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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곤잘
라울곤잘23.01.25

거창 양민 학살사건은 무엇인가요?

대한민국 육군 역사에 길이 남을 수치이자 흑역사라고 하는데요.

어떠한 이유에서 이러한 양민 학살이 일어났는지요?

그리고 육군에게 왜 수치이자 흑역사라고 불리우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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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2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거창 양민학살 사건은 1951년 2월 9일 발생한 사건으로 국군 제11사단 소속 군인들이 마을 주민들을 집단 학살한 사건 입니다.

    이유는 후방에 흩어져 있던 인민군 병력과 빨치산 토벌하기 위해서 라고 하지만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은 군사정권에 하에서 진상이 은폐된 채 묻혀 있다가 1987년 민주화 이후 명예 회복이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거창사건은 1951년 2월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에서 국군 제11사단 소속 군인들이 마을 주민을 집단학살한 사건입니다.

    6.25전쟁 발발 이후 유엔군이 참전해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반격을 개시하자 인민군은 후퇴하였으며, 거창군 신원면은 국군의 서울 탈환 이후 1개월이 지나서야 행정이 회복되기 시작했고, 거창경찰서는 1950년9월27일 수복되지만 신원지서는 11월5일이 되어서야 경찰이 복귀했습니다.

    사건이 발생할 당시 중국인민지원군이 전쟁에 개입해 정부가 1.4후퇴를 한 후 국군과 유엔군의 전면적 반격이 이뤄지고있었으며 거창군 신원면 일대는 국군과 경찰이 이 지역을 수복하기 위해 토벌작전을 전개할 무렵이었습니다.

    제11사단의 토벌작전 개념은 견벽청야인데 이는 최덕신 사단장이 제시한 것으로 군이 꼭 지켜야할 전략거점을 점령 후 군 보급로를 확보하는데 역점을 두고, 인민군이나 빨치산이 주민들로부터 식량을 확보하거나 인력과 물건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산간벽촌의 물자를 옮기고 가옥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제9연대장 오익경으로부터 사단의 작전개념을 구체화한 작전명령 제5호를 지시받은 3대대장 한동석은 1951년 2월 5일 작전에 들어가 신원면 일대로 진격, 3대대는 별다른 저항없이 신원면을 수복 후 인근 지역인 함양군과 산청군 경계로 전진했는데, 2월8일 신원지서가 빨치산의 공격을 받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에 3대대는 연대장의 명령을 받고 다시 신원면으로 들어와 2월9일 청연마을에서부터 주민을 학살, 2월10일 대대는 덕산리 내동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일찍 과정리 면소재지로 이동해 대현리, 와룡리, 중유리 마을에서 가옥을 불태우고, 가축과 양식을 강탈했으며 주민들을 과정리로 몰아가던 중 날이 저물자 주민 100여명을 탄량골 하천 계곡에서 학살합니다.

    군인들은 2월11일 대현리, 와룡리, 중유리 일대 마을 주민 1000여명을 신원국민학교에 모두 모이게 한 후 이 가운데 군인, 경찰, 공무원 가족을 돌려보내고 다음날 517명을 박산골에 끌고 가 총살합니다.

    이처럼 군인들이 민간인을 상대로 강탈과 학살을 행했기 때문에 흑역사로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