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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유난히도 밝은...
별이 유난히도 밝은...23.07.21

우리의 민속문화재에 속하는 씨름경기의 시작과 유래는 어떻게 되는지요?

우리나라 민속경기 씨름은 그역사와 유래가 어떻게되며 씨름은 민속문화재에 속하는지요 그리고 고유무술에도 해당되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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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7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21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구려 시대의 고분 중 각저총의 씨름도 벽화에서 알 수 있듯,

    그 역사가 유구한 놀이이자 스포츠라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반도에서 고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민속 놀이이기에 그 시초가 언제인는 알수가 없습니다.

    씨름의 어원은 힐훔으로, '논쟁하다', '다투다'에서 왔다네요.

    택견에 이어 2017년 1월 4일 무형문화재 제131호로 등재되었습니다.

    씨름에는 여러가지 기술들이 있지요. 그 기술들을 보면 유도 못지 않은 무술의 모습도 보입니다.


  • 안녕하세요. 조사를 해본 결과 씨름은 한국의 대표적인 민속 경기로,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 스포츠입니다. 씨름의 역사는 삼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568년 경에 씨름 대회가 열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씨름은 조선 시대에도 매우 인기 있는 경기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는 민족의 단결을 위해 씨름 대회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씨름은 민속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씨름은 한국의 전통 문화를 대표하는 스포츠로, 한국인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씨름은 고유 무술에도 해당됩니다. 씨름은 힘과 기술을 동시에 요구하는 경기로, 한국의 전통 무술인 태권도와 유도와도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씨름은 한국인의 체력과 정신력을 단련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는 스포츠입니다. 참고 하셔서 도움되셨길 바랍니다. ^^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씨름은 무술 이라기 보다는 한국을 대표하는 세시 풍속 놀이로서 다양한 놀이의 형태가 오늘날까지 온 국민에 의해 활발히 전승되고 있다는 점 고대 삼국 시대부터 근대 시대에 이르기까지 각종 유물, 문헌, 회화 등에서 명확한 역사성이 확인된다는 점 씨름판의 구성과 기술 방식 등에서 우리나라만의 고유성과 표현미가 확연히 드러난다는 점 점 등이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할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아 무형 문화재로 등록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씨름은 우리나라의 고유 운동입니다.

    고구려 시대 고분 주 각저총의 씨름도 벽화에서 알수 있듯 역사가 유구한 놀이이자 스포츠로 한국의 전통 무술이라 할만한 것들 중 태껸과 함께 씨름이 현대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씨름은 상고시대부터 시작된 경기로 형성과정은 알수없으나 주로 각저, 각희 , 상박으로 불렸으며 15세기 이후 실훔, 실홈으로 불리다 씨름이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네 씨름에는 서서 하는 선씨름, 허리띠를 두 손으로 잡는 띠씨름, 오른팔과 다리에 샅바를 감고 겨루는 바씨름, 오른쪽 넓적다리에 맨 샅바를 상대가 왼손으로 잡는 왼씨름, 왼다리에 맨 샅바를 상대가 오른손으로 잡는 오른씨름 등의 다섯 가지가 있다. 이밖에 나이에 따라 어른의 상씨름, 젊은이의 중씨름, 어린이의 애기씨름으로 나누기도 한다. 씨름은 어느 때나 즐기지만, 5월 단오 씨름을 으뜸으로 치며, 7월 백중이나 8월 한가위 씨름은 버금간다.


    우리는 삼국시대 전부터 씨름을 즐겼다. 고구려 씨름은 4세기 말의 씨름무덤과, 5세기 중엽의 장천1호 무덤 그림에 보인다. 씨름무덤의 것은 엄장이 장대한 씨름꾼 둘이 상대 어깨에 턱을 얹고 겨루는 모습이다. 이들은 맨 웃통에 짧은 바지를 입었으며, 오른손을 상대 왼쪽 겨드랑이 밑으로 넣어 허리를 잡고, 왼손은 오른쪽 어깨 위를 거쳐 허리께에 이르렀다. 이들 옆의 지팡이를 집고 선 노인은 심판이다.

    윤권명은 이를 오른씨름이라 하였으나, 오른쪽 어깨를 댄 것을 잘못 본 결과이다. 이들이 샅바를 매지 않은 점에 눈을 돌려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각자의 두 손이 허리께로 가서는 안되며, 오른쪽 사람의 오른손은 왼쪽 사람 넓적다리께로 가야 한다. 그러나 오른손도 상대 허리에 감겨 있어, 그림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상대 허리를 둘러 감은 왼쪽 사람이, 두 손에 잡은 것은 띠인 듯 하다. 샅바가 없고 손이 모두 허리께에 간 점으로 미루어, 띠씨름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고구려의 남녀가 모두 허리에 띠를 두른 사실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띠를 매면 간편하고 활력이 넘치며, 무엇보다 말을 타고 움직이기 편하다. 장천1호 무덤의 씨름 그림도 마찬가지이다. 고구려에는 띠씨름이 유행한 것이다.

    씨름무덤의 두 사람은 네 마리의 새가 앉은 큰 나무 아래서 겨룬다. 큰 나무는 춤무덤 · 사신무덤 · 감신무덤에도 보인다. 춤무덤은 입구 좌우 양쪽에 한 그루씩, 사신무덤은 한 벽에 대칭으로 두 그루를, 감신무덤에는 큰 나뭇가지를 가위다리꼴로 엇갈리게 그렸다. 이들은 모두 신성(神性)을 나타낸다. 단군신화의 환웅도 하늘에서 태백산 신단수(神壇樹)로 내려왔다. 씨름무덤의 나무는 ‘신성한 장소’ 임을 알리는 표지물인 것이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마을의 큰 나무를 당산이라 하여 신으로 받들며, 그 밑에 신당을 짓고 제례를 올린다. 씨름무덤의 나무 이름을 알 수 없으나, 신목(神木)이 흔히 느티나무인 점을 떠올리면 좋다. 느티나무는 일본 궁정에서도 특별한 구실을 하였다. 백제 사절을 느티나무 아래서 맞았고, 특히 덴치(天智, 661~671) 천황이 대화개신(大化改新)을 일으킨 뒤, 군신을 모아놓고 충성을 맹세시킨 자리도 느티나무 아래였다. 지토우(持統, 686~697) 천황 때(9년 5월)는 아스카절(飛鳥寺) 서쪽의 느티나무 아래서 벌였다. 나무 위의 새는 가마귀일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에서는 이를 신성한 새로 여겼으며, 북중국과 시베리아 일대에서도 태양신으로 받든다.

    씨름무덤의 두 씨름꾼 가운데 왼쪽은 ‘눈이 깊고 코가 높은[심목고비(深目高鼻)]’ 것이 서역 사람으로 보인다. 자세히 뜯어보면 볼수록, 고구려 사나이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 그림은 고구려와 서역의 국제 경기 장면인 듯 하다. 이 때문에 심판도 세웠을 것이다. 당시에는 고구려와 서역 사이에 교류가 빈번하였다. 장천1호분이나 삼실총 벽화에 등장하는 적지 않은 서역인이 그 증거이다.

    이밖에 나무 아래에 두 마리의 동물이 보인다. 이제까지는 이를 개로 여겼으나, 1986년에 세밀하게 관찰한 사이또 타다시(齋藤忠)는 곰과 범이라는 주장을 폈다. 그의 말대로 곰과 범이 분명하다면 왼쪽 노인은 단순한 심판이 아니라, 환웅이나 그에 버금가는 신적 존재일 것이다. 따라서 이 그림은 단군신화 자체에 대한 묘사이거나, 적어도 이와 연관이 깊은 내용을 담은 것으로 생각된다.


    또 그는 “씨름판 옆에 나무가 있고 그 위에 네 마리의 새가 앉은 광경을 주의해야 한다. 씨름 광경이 생활의 한 장면이 아니라, 장송(葬送)의례와 연관 되었다고 볼 때, 나무에 그린 네 마리의 새도, 사자의 영혼을 새가 운반하는 사실을 가리키는 듯 하다.”고 덧붙였다. 씨름이 장례와 연관되었다는 것이다.


    백제와 신라의 씨름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두 나라에서도 벌였을 것이다.

    고려와 조선에서는 씨름꾼을 용사라 불렀고, 조선시대에는 왕을 지키는 갑사도 이 가운데서 뽑았다. 세종도 씨름에 열심이었다. 한강변(원년 6월 15일)과 남산(8년 3월 25일, 같은 해 4월 2일), 그리고 동쪽 교외(18년 2월 15일)에서 자주 씨름판을 벌이고, 중국 사신들에게도 보였다. 또 경회루에서 안사의 등에게 씨름을 시키고 상을 주었으며, 무사의 무예 연습 종목에 씨름을 넣었다(『세종실록』 13년[1431] 3월 병술).


    세종은 씨름을 하다가 상대를 죽인 중을 형조에서 교형(絞刑)시키려 들자 “1등을 감하고 장례비를 물어주게 하라.” 일렀다(12년 12월 17일). 이어 같은 해, 같은 달 26일에 일어난 같은 사건에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을 보아도, 그는 씨름 애호가였음에 틀림없다.

    출처 : 동아시아의 놀이



  •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확한 시기는 알수 없는데 삼국시대때 부터는 있었는 걸로 나옵니다. 신라시대에 금석문에 씨름하는 모습도 새겨져 있고, 고려시대에는 씨름판관이라는 관직명도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링검도>라는 책에 씨름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있고 <동국여지승람>에도 언급이 많습니다.

    씨름은 중요무형문화재 제 50호이고 1983년에 지정됐습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도 등재돼있고, 고유무술이라는거 자체가 그 나라의 전통적인 무술을 말하니 고유무술에도 속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