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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도화지113
하얀도화지11323.06.21

과거 조선시대 관료인을 뽑은 과거제도는 문과 무과 이렇게 두가지 시험만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과거 조선시대 관료인을 뽑는 과거 제도는

행정직을 보는 문과와 군사와 관련 된 무과 이렇게 두가지 종류 밖에 없었나요?

드라마에 나오는 한의사 및 기타 기술인들도 관료직을 가지고 있었던것 같은데..

이들은 어떻게 뽑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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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 과거의 종류에는 문과, 무과와 역과 · 의과 · 음양과 · 율과로 이루어진 잡과, 생원 · 진사시가 있었습니다.

    문과와 무과는 같이 실시하였으며,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식년시와 증광시, 별시, 정시, 알성시 등의 비정기 시험을 실행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잡업은 과거제가 실시된 초기부터 양대업(兩大業: 製述業·明經業)에 비해 경시되었으며 후기로 갈수록 더하였다. 중기에는 각각의 담당관서에서 예비시험과 교육을 담당하였으나 선발된 자의 명단은 기록에 밝혀져 있지 않다.


    잡업 가운데에는 중국의 과거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과목으로 잡업에서 출제한 참고서목이 『고려사(高麗史)』 선거지(選擧志)에 수록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에는 중국 과학사에서도 가장 일찍이 일서화(逸書化)된 것이 포함되어 있어서, 고려시대에는 중국의 과학기술서적을 매우 중요시하였으며, 잘 보존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392년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제정된 입관보리법(入官補吏法)에 의하면 문음(門蔭)과 문무과 이외에 잡과로서 이과(吏科)·역과(譯科)·의과(醫科)·음양과(陰陽科) 등 4과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과 이외에 이문과(吏文科)도 잠시 실시된 적이 있었으나,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이 2과 대신 율과(律科)가 첨가되어 역·의·음양·율의 4과가 실시되었다.


    조선시대의 잡과는 식년시(式年試)와 증광시(增廣試)에만 설행(設行)되었고, 초시·복시 두 차례의 시험만 있었으며 전시(殿試)는 없었다. 식년잡과의 초시는 상식년(上式年) 가을에 해당아문의 주관 아래 시행되었고, 복시는 각 아문과 예조가 주관하였다

    시험과목은 전문서(專門書)·경서(經書)·『경국대전』을 필수과목으로 하였다. 각 과목은 통(通)·약(略)·조(粗)로 채점하는데 통은 2분(分), 약은 1분, 조는 반분으로 계산하여 분수가 많은 자를 선발하였다.


    합격자에게는 홍패(紅牌)를 주다가 뒤에 백패(白牌)로 바꾸었다. 그런데 생원진사시 합격자들에게 주는 백패에는 국보(國寶)를 찍었으나, 잡과의 백패에는 예조인(禮曹印)만 찍어주었다.


    잡과 출신자들은 각 아문의 권지(權知)로 임명되었는데 역과 1등은 본아문 종7품계를, 2등은 종8품계를, 3등은 종9품계를 받았으며, 다른 잡과의 1등은 종8품계를, 2등은 정9품계를, 3등은 종9품계를 받았다.


    이미 품계를 가진 자는 1계를 더해 주되 가자(加資)한 품계가 마땅히 받아야 할 품계와 같을 때에는 거기에 1계를 더 올려주었다. 이들 잡과 합격자들은 합격하지 못한 자들보다 훨씬 우대를 받았다.


    일례로 잡과 출신자라야 참상계(參上階)로 올라갈 수 있었으며, 의금부에서 치죄할 때 태(笞)·장(杖)을 치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잡과에는 잡학생도(雜學生徒)·전함기술관(前銜技術官) 및 7품 이하 관리로서 기술학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응시할 수 있었다.


    『경국대전』에 문과는 정3품 통훈대부, 생원진사시는 정5품 통덕랑 이하만이 응시하도록 한 데 비해 잡과에는 7품 이하만이 응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어 잡과가 문과나 생원진사시보다 경시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양반자제들은 잡과를 천시하여 응시하지 않았고, 대체로 기술관의 자제나 향리·교생·서얼·양가자제들만이 응시하게 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의 과거 시험 종류에는 문과 무과, 잡과가 있었습니다.

    문과는 3년마다 치르는 정기시인 식년시와, 비정기시인 증광시, 별시, 알성시 등이 있었고 초시, 복시, 전시 순으로 초시서 각도의 인구 비례에 맞게 뽑아 복시에 33인을 선발, 왕 앞에서 치르는 전시에서 순위를 결정했습니다.

    무과 시험은 조선시대 무인을 선발하기 위해 실시한 과거 시험으로 고려시대 실시하지 않았던 것과 달리 시행된 과거시험으로 문과와 마찬가지로 3년마다 한번씩 치러지는 식년무과와 각종 비정규 무과가 있었고, 식년 무과는 초시, 복시, 전시 세 단계로 시험이 이루어졌습니다.

    잡과시험은 잡업이라 하여 기술관 등용을 위해 실시하던 과거 시험으로 외국어인 역과, 법률과인 율과, 의술과인 의과, 천문학 공부를 하는 음양과 등의 많은 종류의 잡과를 두었습니다.

    무과와 문과와 달리 응시 인원이 적어 식년시, 증광시 두 가지 시험이 존재했고 초시와 본시 두 단계만 존재했으며 보통 기술직이었으므로 세습이 되는 경우가 많았고, 중인으로서 양반과 평민 사이의 독자적 신분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조형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때 관리를 선발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먼저 과거 제도는 문과, 무과, 잡과로 나뉘었습니다. 문과는 양인 이상만 응시가 가능하며 서얼(첩의 자식)이나 재가한 부인의 아들은 응시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고려 시대에는 무과가 없고 승과가 있었는데, 조선 시대에는 승과는 없고 무과가 있습니다. 잡과는 중인들을 선발하는 형태입니다. 말씀하신 한의사는 잡과(기술직렬 공무원 or 전문직)에 속합니다. 그리고 천거라는 제도도 있었습니다. 현량과라고 해서 누군가를 추천해서 발탁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2품 이상 자손들은 시험을 안 치고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고위 관료는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취재라고 기술 실무자를 뽑는 시험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하급관리이고 따로 품계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