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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한호랑이161
심심한호랑이16123.05.29

일제강점기 독립운동단체는 어디가 있나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이 이루어졌는데 독립운동단체가 여러 이름도 안알려지고 활동하고 있었던걸로 압니다

이름이 명명된 독립운동단체가 어디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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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9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19년 3·1운동 후 서간도에서는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대한독립군비단 등의 무장독립운동단체가 조직되었다. 1919년 11월 3·1운동 후 조직된 한족회의 회원 등이 유하현에 설립한 서로군정서는 독판 이상룡, 정무청장 이탁(李沰), 참모부장 김동삼, 사령관 지청천 등의 지도로 운영되었다. 서로군정서는 3·1운동 후 유하현 고산자(孤山子) 하동(河東)에 40여 칸의 광대한 병사와 수만 평의 연병장을 가진 ‘신흥무관학교’를 운영하였다. 신흥무관학교에서는 보병·기병·포병·공병·보급 등의 군사학과 사격술 외에 독립군가를 가르쳐 2,000여 명의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서로군정서는 국내로 들어와 일본의 주재소와 관공서를 습격·파괴하고, 친일파 관료와 밀정을 제거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4월 의병계열의 인물들이 유하현에 설립한 대한독립단은 도총재 박장호, 총단장 조맹선 등의 지휘 하에 군자금과 독립군 모집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1919년 5월 장백현에 조직된 대한독립군비단은 함남 북청과 단천 등지에 지단을 설치하고 국내에 진공하여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3·1운동 후 북간도에는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 대한국민회의 국민군, 대한독립군, 대한군무도독부, 대한의군부, 신민단, 의민단, 광복단, 한민회, 야단 등의 무장독립운동단체가 있었다. 이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은 군자금 모집 등의 혼선을 방지하고 전투와 통신·연락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하여 협의회를 운영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2~3개의 연대급 부대로 편성되었다.

    대한군정서는 3·1운동 후 북간도에서 대종교의 중광단(重光團)과 유교신도의 공교회(孔敎會)가 합하여 성립한 대한정의단에서 기원하였다. 대한정의단은 공교도가 이탈한 후 대한군정부로 변경되었다가 그 해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대한군정서로 명칭을 바꾸었다. 대한군정서는 왕청현(汪淸縣) 춘명향(春明鄕) 덕원리에 총재부를 두었고, 춘명향 서대파에 사령부를 두었다.

    대한군정서의 총재는 서일이었고, 사령관은 김좌진이었다. 대한군정서는 1920년 8월 중순 대원 1,200명, 소총 1,200정, 탄약 24,000발, 권총 150정, 기관총 7정, 수류탄 780개를 보유하고 있었다. 대한군정서는 서대파 십리평에 사관연성소를 설치하고, 18세에서 30세의 청년을 선발하여 6개월 속성 과정으로 간부를 양성하여 1920년 9월 근 300명의 간부를 배출하였다.

    대한국민회는 1919년 3·1운동 후 연길현 국자가에서 설립된 조선독립기성회에서 기원하였다. 연길현 춘양향(春陽鄕) 하마탕(蛤蟆塘)과 연길현 지인향(志仁鄕) 의란구(依蘭溝)에 근거하여 활동한 대한국민회는 민정기관으로 8개의 지방회와 130개의 지회를 두었을 뿐만 아니라 안무를 사령관으로 하는 대한국민군을 편성하였다. 1920년 초 연길현 지인향 의란구 백가 지방과 연길현 숭례향 명월구 상촌 오동촌 지방에 근거를 둔 대한국민군은 1920년 8월 경 대원 450명, 군총 600정, 탄약 7,000발, 권총 160정, 수류탄 120개를 보유하고 있었다.

    대한독립군은 연해주로 망명하여 활동하던 홍범도가 3·1운동 후 훈춘에 들어와 연해주의 수이푼 등지에서 150명의 독립군을 모아 조직한 부대였다. 근거지를 왕청현 봉오동에 둔 대한독립군은 1920년 초 대원 160명, 군총 200정, 탄약 군총당 200발, 권총 30정을 보유하였다.

    대한군무도독부는 최명록(최진동)이 이끌던 부대로 왕청현 춘화향 봉오동에 본부를 두었다. 총재는 최진동, 참모는 박영이었다. 1920년 초 대한군무도독부는 대원 280명, 군총 200정, 탄약 군총당 80발, 권총 50정, 수류탄 120개, 기관총 20정을 보유하였다.

    대한의군부는 3·1운동 후 북간도와 연해주의 의병세력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부대로, 왕청현 춘화향 봉오동과 왕청현 춘명향 대감자에 근거를 두었다. 이범윤이 총재, 김영선이 사령관이었다. 전투 부대로는 허근이 대장으로 있던 대한의군전위대와 최우익을 총무로 하는 대한의군산포대가 있었다. 대한의군전위대는 약 100명, 대한의군산포대는 약 160명의 대원이 있었다.

    신민단은 3·1운동 후 훈춘에서 김규면이 성리교인을 중심으로 조직한 무장독립운동단체였다. 1920년 초 왕청현 춘화향 석현에 근거를 두고 단장 김준근의 통솔 하에 활동하였다. 당시 대원은 200명이었고, 군총 160정, 탄약 총당 60발, 권총 30정, 수류탄 48개를 보유하였다.

    대한의민단은 1920년 4·5월 경 연길현 숭례향 묘구에서 천주교인과 의병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부대로 단장은 방우룡이었다. 대원이 300명이었으며, 군총 400정, 탄약 40,000발, 권총 50정, 수류탄 480개를 보유하고 있었다.

    광복단은 대한제국의 복벽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1920년에 세운 독립운동단체였다. 단장 이범윤 외에 김성륜, 김성극, 홍두식, 황운서 등이 이끌었다. 1920년 8월 현재 단원은 200명이었으며, 군총 300정, 탄약 11,000발, 권총 30정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민회는 3·1운동 후 훈춘에서 조직된 무장독립운동단체로 황병길, 이명순, 윤동철 등이 주도하였다. 1920년 8월 병력 250명, 군총 300정, 기관총 3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야단은 청림교의 교인들이 만든 무장독립운동 단체였다.

    북간도에 설립된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은 군자금과 독립군 모집 등에 나타나는 상호 충돌을 방지하고, 통신·연락의 원활, 연합적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1920년 5월 협의회를 조직하였다. 1920년 5월 5일 신민단, 대한군정서, 군무도독부, 광복단, 대한국민회, 의군부의 대표는 제1차 협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개별로 각지에 파견된 모연대를 소환하고, 군자금을 모금할 때는 협의회의 의결로 하고, 경계경보가 있을 때는 힘을 합하여 구원하고, 단독으로 행하기 어려운 활동은 협의회의 의결로 함께 하기로 하였다. 이 모임에서 청림교도를 중심으로 조직된 임창세 단장의 야단(野團)은 대한군정서에 합하기로 결정되었다.

    제1차 협의회의 개최 직후인 1920년 5월 말 대한군무도독부 대표인 최진동, 대한국민회 대표인 김병호, 대한국민회 군무위원회 대표인 안무는 만나서 국민회 군무위원회와 군무도독부의 명칭을 취소하고 그 기관을 통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대한북로독군부 산하에는 군정을 담당하는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部)와 군령을 담당하는 대한북로사령부(大韓北路司令部)를 두고,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部)의 부장(部長)에는 최진동, 대한북로사령부(大韓北路司令部)의 부장에는 홍범도를 임명하였다.

    얼마 뒤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는 홍범도의 정일제일군사령부(征日第一軍司令部)와 협의하여 대한북로사령부(大韓北路司令部)를 북로제일군사령부(北路第一軍司令部)로 변경하였다. 그리고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部) 대신에 군무국을 두고 그 산하에 군무과, 회계과, 검사과, 통신과, 치중과, 향무과, 피복과를 두어 전투지원의 체제를 강화하였다.

    더 나아가 북간도의 무장독립운동단체는 1920년 7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파원인 안정근, 왕삼덕, 이용 등과 협의하여 행정기관으로 ‘대한민단’을 조직하고, 군무기관으로는 김좌진의 대한군정서를 개칭한 동도군정서와 홍범도의 범대한독립군계로 구성된 동도독립군서를 조직하였다. 동도군정서는 서장이 서일, 사령관이 김좌진이었고, 각기 4개 중대로 구성된 4개의 대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대한군정서 산하에는 노령에서 서상열이 이끌던 동도파견부가 예속되어 있었다. 대한독립군·국민군·군무도독부로 구성된 북로제일군사령부의 군인과 의군부, 의민단의 군인으로 구성된 동도독립군서는 서장 겸 사령관이 홍범도이었고, 사령관 직속의 2개 중대와 2~4개 중대로 구성된 4개 대대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동도독립군서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및 대한국민회의 국민군을 주축으로 하는 부대와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및 이범윤의 의군부를 주축으로 하는 부대 간에 작전상의 문제로 대립이 있었던 것 같다. 그 결과 청산리전투 직전인 1920년 9월 말 경 최진동이 이끄는 군무도독부의 군인들은 동도독립군서 혹은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에서 이탈하여 왕청현 나자구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의군부, 신민단, 포수단 등과 합하여 총군부(總軍府)를 조직하였다. 총군부의 총장은 이범윤이었고, 그 휘하의 부장(副將)은 최진동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무장독립운동단체의 조직과 연합체제의 편성 (독립전쟁, 그 위대한 여정, 2015. 8. 30.)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10년대(적색은 무장단체)

    국내

    독립의군부(1912 . 임병찬)

    송죽형제회(1913. 황에스터,김경희등 평양 숭의 여학교 교사)

    조선국권회복단(1915. 윤상태,서상일,이시영)

    대한광복회(1915. 박상진, 채기중, 김좌진)

    조선국민회(1915.장일환, 배민수, 평양 숭실학교)

    자립단(1915.방주익,강명환)

    선명단(1915.임광모,정연웅-일제요인 암살목적)

    국외 (중국)

    한흥동(1909, 이상설,이승희, 최초의 독립운동기지)

    삼원보(1911.이동녕, 이회영 )-> 신한민촌->경학사->신흥강습소

    서전서숙(1906. 이상설)

    중광단(1911. 서일) -> 대한정의단

    동제사(1912.신규식,박은식,정인보,신채호,조소앙)

    신한혁명당(1915.이상설,박은식, 신규식)

    신한청년당(1918.여운형, 김철, 김규식)

    국외(러시아지역)

    한민회(1905)

    13도의군(1910. 유인석, 이범윤, 홍범도)

    성명회(1910. 유인석,이상설)

    권업회(1911.이범윤)

    대한광복군정부(1914. 이상설.이동휘)

    대한국민회의(1919)

    국외(유럽,미국)

    신민회(1903. 홍승하, 윤병구)

    한인합성협회(1907)

    대한인국민회(1910)

    흥사단(1913. 안창호, 美센프란시스코)

    대조선국민군단(1914.박용만 )

    숭무학교(1909.이근영,신광희 멕시코지역)

    국외(일본)

    조선청년독립단(1919. 조선학회,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1920년대 (3.1운동 이후)

    국내

    천마산대(1919. 최시흥) -> 대한통의부 편입

    보합단(1920.김동식) ->대한독립단 흡수

    구월산대(1920. 이명서)

    신간회(1927)

    국외

    의열단(1919. 김원봉)

    서로군정서(1919. 이상룡, 이탁) ->육군주만참의부 흡수

    대한독립단(1919. 박장호, 조맹선) ->광복군사령부 흡수

    광복군사령부(1920 조병준,안병찬)

    광복군총영(1920.)

    대한통의부(1922)

    북로군정서(1919. 김좌진)

    대한독립군단(1921. 북로군정서.서로군정서,국민회군)

    대한독립군(1919. 홍범도)

    육군주만참의부(1923.백광운)

    정의부(1923. 오동진 등등)

    신민부(1925.대한독립군단+대한독립군정서)

    조선혁명당(1929)

    한국독립당(1930.이청천.홍진)

    한국혁명당(1929.윤기섭. 신익희)

    한국독립당(1930.이동녕.김구,안창호)

    1930년대

    한국독립군(1932. 지청천)

    조선혁명군(1932.양세봉)

    조선민족혁명당(1935. 의열단+한국독립당+신한혁명당+조선혁명단+광복단)

    한국국민당(1935.김구,이동녕 한인애국단+임시정부 고수파)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진선, 1937. 조소앙.이청천)

    조선민족전선연맹(1937. 김원봉)

    조선의용대(1938. 김원봉)

    전국연합진선협회(1939. 김구,김원봉)

    동북인민혁명군(1933)

    동북항일연군(1936. 동북인민혁명군)

    조국광복회(1936. 동북항일연군 간부)

    1940년대

    한국독립당(1940.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한국광복군(1940. 한국독립당 -> 대한민국 국군의 모태)

    화북청년연합회(1941.최창익,허정숙)

    조선독립동맹(1942. 김두봉,무정,최창익)

    조선의용군(1942. 김두봉, 무정.박효삼)



    핵심단체(반드시 시험에 나옵니다 한국사 자격시험에 7년 연속 출제된문제입니다)

    조선민족혁명당

    1926년 상해 임시정부를 둘러싼 독립운동 단체들이 일본과 싸우기 위하여 통일동맹을 하여 만들어진 단체로 5당이 모여 결성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단체로 분류되고 있으며

    1926년 김원봉이 창당했으나

    1932년 해외단체를 통합, 국제정세의 약화에 따라 주의, 사상을 초월한 공동전선으로 단합할 것을 목적으로 하여 김규식, 신익희 등이 중심이 되어 한국독립단, 조선혁명당, 의열단, 신한독립당, 미주대한인독립단 등을 통합해 남경에서 재창당 했음.

    1935년 김원봉·지청천 김규식의 민족혁명당에 참가하였다.가 김원봉과 갈등하다가 김원봉이 좌익 경력자들에 대한 유화와 포용책을 펼치자 반발하여 지청천은 1937년 4월에 탈당하고 조선혁명당을 창당하였습니다

    조선혁명당(1937년 4월)

    대한의 독립을 위하여 일본과 맞써 싸운 단체로 지청천, 유동열, 최동오, 김학규, 황학수, 이복원, 안일청, 현익철등이 중심이되어 1937년4월에 결성.

    사회주의계열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민족전위동맹, 조선혁명자연맹

    조선노농총동맹 조선농민총동맹

    사회주의계열 정당 설립연도

    조선노농총동맹 (1924년)

    조선민족혁명당,(1926년)

    조선농민총동맹 (1927년)

    조선혁명자연맹 (1930년)

    조선민족전위동맹, (1936년)

    조선민족해방동맹, (1937년)

    민족주의계열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민족주의계열(정당 설립순서)

    한국독립당(1930년), 한국국민당(1935년), 조선혁명당(1937년) 광복군(1940년)



    조선의용대 변천사

    조선의용대(1938년)

    대장 김원봉과 조선민족혁명당의 주도로1938년 10월 10일중국 한커우(漢口)에서 결성된 독립군이다. 조선민족전위동맹 산하의 단체로 분류 후일에 광복군과 연합 흡수.

    조선의용군(1938년)

    1938년 10월 10일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의 일부가 분리되어 신설된 항일 무장단체로, 중국 화북지대에 조직된 항일 무장투쟁 군사조직을 말한다. 1942년 조선의용군으로 흡수됩니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1941년)

    1941년 김원봉과 의용대내의 라이벌이었던 공산주의자 최창익은 의용대가 화북으로 이동하자

    무정, 김두봉, 한빈 등을 내세워 화북지방의 의용대 통제권을 장악 합니다 .

    1938년 10월 10일 호북성무한에서 창설된 조선의용대의 주력 80여 명은 1941년 여름 화북의 팔로군 근거지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이미 항일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조선 청년들과 함께

    1941년 7월 7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창설하고 일제 패망 때까지 화북 각지에서 항일전을 수행. 이 사이 1942년 7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칭하게됩니다

    이때부터 조선의용대는. 이들은 북조선의 성립 후에 정치세력인 연안파 라고 합니다.

    화북조선청년연합회 [華北朝鮮靑年聯合會](1941년)

    1941년 중국 동북지역의 조선인 공산주의자 및 조선의용대 일부가 결성한 민족해방운동조직.

    화북조선독립동맹의 전신입니다

    1938년 중국 내 조선민족해방운동조직인 조선민족혁명당 내에서 김원봉(金元鳳)의 노선에 반대하여 탈당한 최창익(崔昌益) 등이 조선청년전위동맹을 결성 같은 해 10월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의 무장력으로 재편된 조선의용대가 일제의 중국 침략을 피해 남하 이에 반발한 조선의용대의 많은 대원들은 화베이[華北] 지방으로 북상해서 홍군(紅軍)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합니다 이에 옌안[延安]에 있던 조선민족전선연맹의 최창익 등은 홍군 포병단장이던 무정(武亭)과 만나 항일•조중연합•조선독립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새로운 조직을 만들기로 결의다. 이들은 중국공산당의 항일군정대학 졸업자와 북상한 조선의용대원을 중심으로 1941년 1월10일 산시 성[山西省] 타이항 산[太行山]에서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조직한것입니다

    조선독립동맹 (1940년)

    한국의 독립운동단체이자 해방정국의 좌파 정당이었다. 1940년 중화민국 화베이에서 결성되어 화북조선독립동맹이라고도 부른다. 당수는 김두봉이었고, 김무정, 최창익, 백남운, 허정숙 등이 당의 주요 간부로 활동하였으며, 당의 군사조직을 갖추고 있었고. 당의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는 김무정이 총사령으로 지휘하였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귀국하였다. 1946년 한반도 남부에서는 백남운에 의해 남조선신민당으로, 한반도 북부에서는 김두봉, 김무정에 의해 북조선신민당으로 각각 분열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