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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maan
rogermaan23.06.30

부산의 조선시대 모습은 어떠했나요

현재 부산 인구가 줄어들긴 하지만 대한민국 제 2의 도시로서 규모를 유지 하고 있는데요 조선 시대의 부산에 모습은 어떻게 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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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시 부산항은 일본 및 여러 국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했습니다.

    다른 지역보다 개방적이었고, 새로운 것들이 많았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부산의 지명은 부산포에서 유래된것으로 15세기 전반까지는 부산포라 했고,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지금 동구 좌천동에 있는 증산의 모양을 따 부산이라 불렀습니다.

    조선시대 부산포는 당시의 독립된 지방행정 단위는 아니었고 초기 동래현과 그 속현이었던 동평현의 관할 아래 있었고 그 후 계속해서 동래도호부의 구역내에 포함되어있었습니다.

    조선 태조 6년 동래에 진이 설치되고 병마사가 동래의 행정관인 판현사가 겸임, 동래현의 속현인 동평현은 고려 때는 양주의 영현이었으나 태종 5년 동해현의 속현이 되었고 동왕 9년 다시 양주에 속했다가 그 후 세종 5년 병마사가 첨절제사로 개칭, 판현사를 겸했습니다.

    세종 10년 다시 동래현의 속현으로 현령의 행정적인 지휘감독을 받으며 그 후 속현제도가 없어짐에 따라 동래현에 통합되었으며 세종 22년 부산포에 일본인의 내왕이 빈번하자 진을 속현인 동평현으로 옮겼다가 동래로 환진, 다시 판현사를 현령으로 바꾸었습니다.

    그후 명종 2년 도호부로 승격시켜 무관을 부사로 임명, 그 아래 판관을 두었으나 선조 34년 외교상의 사정을 감안 당상의 문관을 부사로 삼고 판관제도를 폐지합니다. 효종 6년 동래부에 독진을 설치, 숙종 16년 부사가 방어사를 겸임하게 되나 2년 후 방어사는 없어졌고 영조 15년 부사가 동래성과 금정산성의 수성장을 겸임해 고종 32년 까지 계속됩니다.

    군사적으로는 고려말부터 계속되는 왜구의 창궐로 그 폐해가 심해 태종 7년 부산포와 내이포 두 곳에 왜관을 두어 일본인의 내왕과 함께 교역을 허용하나 왜구의 침탈이 계속되자 세종 원년 왜구의 소굴이었던 대마도를 정벌하고 이 후 왜의 국교 재개의 간청에 따라 세종 5년 부산포와 내이포에 다시 왜관을 두고 동왕 9년 울산 염포에 왜관을 설치합니다. 세종 25년 계해약조를 맺어 무역선의 수와 세사미두의 수량을 제한하기도 했습니다.

    삼포의 왜관은 지역을 제한하고 임진왜란 후 동래부사가 일본사신을 접견, 왜관에서만 왜인들의 거주가 허락되었고 왜관 주위에는 복병막소를 설치해 왜인은 물론 조선인의 출입을 통제, 허가를 받은 사람만 출입이 허용되었습니다. 부산포에 설치된 왜관의 변천은 태종대에서 중종 5년 경오왜변 이전까지는 부산포왜관, 선조 36년 잠시 절영도왜관에 있었고 선조 40년 두모포왜관, 숙종 4년 ~고종 13년 까지 초량왜관이 존속하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후 진관거류지로 바뀌었습니다.

    부산은 나라의 관문이었기 때문에 국방상 요충지였으니 금정산성은 그 규모로 볼때 국내 최대의 산성이며 국방시설도 발달하여 지금의 수영에는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부산진에는 부산진영이 설치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397년(태조 6) 동래에 진을 설치해 병마사가 판현사(判縣事)를 겸했다. 고려 말부터 창궐하던 왜구가 1396년 동래현·동평현·기장현을 침범하였다. 1423년(세종 5) 부산포를 개항해 왜관을 설치하였다. 1428년 동평현이 동래현 소속으로 복귀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세종 때 동래현의 호구수는 290호 2,416인이며, 동평현은 108호 627인이었다.


    1510년(중종 5) 삼포왜란으로 왜관을 폐쇄했다가 1512년 다시 개관하였다. 1547년(명종 2) 동래현이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592년(선조 25) 울산 개운포(開雲浦)에 있던 경상좌수사영(慶尙左水使營)을 수영(水營: 지금의 남구 수영동)으로 옮겼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산첨사 정발(鄭撥)은 부산진성을,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과 양산군수 조영규(趙英圭)는 동래성을, 다대포첨사 윤흥신(尹興信)은 다대포성을 사수하다가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이 싸움에서 많은 군·민이 성과 운명을 같이했으며, 또 이 지방 주민들은 스스로 의병으로 단합해 적을 무찌르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워 난이 끝난 뒤 선무원종공신의 칭호와 은전을 받은 사람만도 66인이나 되었다.


    1605년 동래부사 윤훤(尹暄)이 송상현을 모시기 위해 송공사(宋公祠)를 세웠다가 1624년(인조 2) 충렬사(忠烈祠)로 사액되면서 임진왜란 때 이 지방에서 순국한 모든 충신·열사를 합사하게 되었다. 당시의 공방전을 사실적으로 그린 「동래부순절도」와 「부산진순절도」가 동래 안락서원(安樂書院)에 전해왔다.

    임진왜란 때 동래성이 함락된 뒤 현으로 강등했다가 1599년 다시 도호부로 승격하였다. 1607년 두모포(豆毛浦)에 왜관이 다시 설치되었다. 1655년(효종 6) 동래부에 독진(獨鎭)이 설치되었다. 1690년(숙종 16) 부사가 방어사를 겸했다가 2년 뒤에 방어사가 폐지되었다. 1678년 왜관을 초량(草梁: 지금의 용두산 일대)으로 옮겼다.


    1763년(영조 39) 통신사로 일본에 간 조엄(趙曮)이 대마도에서 고구마 종자를 가져와 동래부사 강필리(姜必履)가 그 재배에 성공함으로써 전국에 퍼졌다. 『동래부읍지』에 의하면 1759년의 동래부 호구수는 6657호 2만 5753인이었다.


    1876년(고종 13) 병자수호조약 체결에 따라 부산포가 개항장이 되었다. 1877년 부산에 조계(租界)가 설치되었으며, 일본·청국·영국의 영사관이 설치되었다. 1883년 개항에 따른 항만관리·외교사무를 담당하기 위한 감리(監理)를 두어 동래부사가 이를 겸임했으며, 부산해관(釜山海關, 부산세관)을 설치하였다.

    1890년 동래감리서(東萊監理署)를 설치하였다. 1895년 지방관제 개정으로 동래부는 경상남도에 소속되었다. 1903년 군으로 강등했다가 1906년 다시 부로 승격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시에 동래군이 되었다. 1906년 일본영사관이 폐지되고 이사청(理事廳)이 개설되었다.


    1908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었으며, 옛 부산역 일대의 매축 공사가 준공되었다. 1909년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下關) 사이에 연락선이 취항하였다. 1914년에 동래부가 부산부로 개편되었다. 1915년에 부산진과 동래 온천장 사이에 전차가 개통되었으며, 이듬 해 시내 전차도 개통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