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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angel
Youangel23.09.03

김치양의 생애에 대해 알고싶습니다

안녕하세요 고려시대 천추태후의 연인으로 알고있는 김치양은 유배생활까지 했던것으로 아는데요 어떻게 권력을 잡게됐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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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9.03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치양이 누구인지가 궁금하군요.

    김치양은 고려 전기 목종 때에 반란을 일으킨 권신입니다.
    승려 행세를 하면서 천추궁(千秋宮)에 출입하며 천추태후와 추문을 일으켰는데,

    성종이 즉위하면서 유배되었다가, 목종이 즉위하면서 천추태후가 권력을 장악한 이후 관료의 인사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서경 세력에 속한 그는 목종대 종교와 신앙을 바탕으로 통치하려고 하였으며, 천추태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지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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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전기 목종대에 반란을 일으킨 권신입니다.

    채조 왕건의 공신 김행파의 후손일수있으며 목종의 어머니인 천추태후의 외척입니다.

    경종이 죽은 후 승려 행세를 하며 천추궁에 출입, 천추태후와 추문을 일으켰는데 성종은 즉위하자 김치양을 유배보내는데 그가 실제 화엄종 승려였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목종이 즉위 후 천추태후는 실권을 장악하고 김치양을 합문지후 통사사인에 임명, 이후 국왕의 측근이면서 재정을 맡은 우복야 겸 삼사사가 되어 관료의 인사권을 장악하고 행사합니다. 그는 자신의 세력을 조정에 심었는데 유행간과 이주정 등을 그의 정치세력이라 하지만 이들이 친당이 아닌 단지 협조하는 관계였다고 보기도 합니다.

    김치양은 고려 초 이래 성장한 서경 세력에 속했다고 여겨지며 목종에게 네 차례나 서경 행차를 하게 하였으며 그때마다 방악과 주진의 신기에 대한 재제 의식을 갖게 했으며 이 조치는 성종대에 있던 산천에 대한 제사 삭감을 다시 복구한 것, 그는 자신의 출신지인 서흥에 성수사라는 사당을 지었고 궁성 서북쪽에 시왕사를 세웠는데 도교, 불교 및 토속신앙에 바탕을 둔 곳입니다.

    1003년 천추태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자 당시 왕위계승에 가장 유력한 태조의 손자인 대량원군 왕순을 승려로 만들어 숭경사에 보내고 후 왕순을 삼각산신혈사로 옮긴 후 여러 차례 자객을 보내나 실패, 김치양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고 아들의 왕위계승을 위해 친거란 정책을 주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1009년 천추궁 옆 대부의 기름창고에 화재가 일어나 천추전이 불타는데 이 화재는 김치양이 대량원군을 추대하려는 반대 세력을 축출하려는 의도로 저지른 것이라는 견해와 반대 세력인 유진, 채충순, 최항, 강조 등이 김치양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으로 보기도 합니다.

    화재에 큰 충격을 받아 병이 난 목종이 정무를 보지 않자 그는 반란을 도모하려했고, 이 계획은 유충정의 밀고로 드러나게 되며 목종은 최항, 채충순, 황보유의 등에게 신혈사에서 대량원군을 맞아들이게 하였고,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에게 군사를 이끌고 입위할것을 지시, 강조는 무장병력을 이끌고 김치양과 그의 아들을 죽이고 목종을 폐위한 후 대량원군을 왕위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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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본관 동주(洞州: 황해도 瑞興). 목종의 어머니 헌애왕후(獻哀王后) 황보씨(皇甫氏)의 외척(外戚). 승려를 사칭하고 천추궁(千秋宮)에 출입하여 추잡한 소문이 자자하였으므로 성종(成宗)이 멀리 장배(杖配)하였으나, 목종이 즉위하자 천추태후(千秋太后: 헌애왕후)가 불러올려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을 시켰다가 이어 우복야(右僕射) 겸 삼사사(三司事)로 임명하자 권력을 남용하기 시작하였다.


    친당(親黨)을 요직에 앉히고 뇌물을 공공연히 받아 300여 칸의 저택을 짓는 등 횡포가 심하였다. 천추태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왕위를 잇게 하고자 대량군(大良君) 순(詢)을 살해할 모의를 하다가 실패하고, 다시 유일한 혈통인 목종을 살해하려다가 성공하지 못하였다. 1009년 강조(康兆)의 정변(政變)으로 순(詢: 현종)이 즉위하자 아들과 함께 처형되었으며, 그의 일당과 태후의 친척 이주정(李周禎) 등은 해도(海島)로 유배되고 왕과 태후는 충주로 내쫓겼다.

    출처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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