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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조용한문어8023.12.14

백제 멸망 후 백제에 대한 평가 중에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의자왕의 부인에 대해서 안좋은 평가가 있는데요.

당나라 사령관이었던 소정방은 백제 정림사 5층 석탑에다가 '안으로 요사스러운 부인을 믿었다'라고 되어 있고,

일본 기록에는 '임금의 대부인이 요사스럽고 간사한 여자로서 무도하여 마음대로 권력을 빼앗았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 여자는 누구이며 어떤 짓을 했었던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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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은고부인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스빈다.

    백제 멸망을 정당화 시키기 위하여

    의자왕의 부인인 은고부인을 악의적으로

    깍아내린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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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은고는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왕비입니다. 군대부인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립니다.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망한 후 660년(의자왕 20년) 7월 13일에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 당나라로 끌려갔습니다. 대당평백제국비문, 일본서기는 백제의 군대부인이라는 요녀가 백제의 군대부인이라는 요녀가 백제 멸망에 크게 작용했다고 하는데 군대부인과 은고가 동일인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무도하여서 국병을 마음대로 빼앗고 현량들을 주살하여 백제가 망하는 화를 초래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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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항차 밖으로 곧은 신하는 버리고 안으로 요사스러운 부인을 믿어, 형벌은 오직 충직스럽고 어진 자에게만 미치고 총애와 신임은 아첨하는 자에게 먼저 더해졌다.『정림사지 5층 석탑 <대당평백제비명>』

    고구려 승려 도현(道顯)의 《일본세기(日本世記)》[27]에 "7월에 운운, 춘추지(春秋智)가 대장군 소정방(蘇定方)의 도움을 얻어 백제를 협공하여 멸망시켰다. 혹은 백제는 자멸하였다. 왕의 하시카시(대부인, 大夫人)[28]가 요사스럽고 무도하여 국정을 좌우하고 현명하고 어진 신하를 주살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화를 초래하였다.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일본서기》권 제26 <제명기>

    백제왕 의자(義慈), 그의 처 은고(恩古), 그 아들 융(隆) 등, 그 신하 좌평 천복(千福), 국변성(國辨成), 손등(孫登) 등 모두 50여 명이 가을 7월 13일에 소장군(蘇將軍, 소정방)에게 사로잡혀 당(唐)에 보내졌다. 아마도 이것은 까닭 없이 무기를 들고 다닌 징험일 것이다.

    《일본서기》 권 26 <제명기>

    물론 왕의 부인이 여러 명일 수는 있다. 그러나 여러 기록들을 살펴보면 은고, 대부인(大夫人), 왕후, 당고종의 질책을 들은 여인이 모두 동일인임을 알 수 있다.

    至庚申年七月。百濟遣使奏言。大唐。新羅幷力伐我 旣以義慈王。々后。太子爲虜而去
    경신년 7월에 이르러 백제가 사자를 보내, 당과 신라가 힘을 합해 우리를 공격하여 이미 의자왕, 왕후, 태자를 포로로 하여 갔다고 아뢰었다.

    『《일본서기》 사이메이 덴노 6년, 660』

    4년(서기 644) 봄 정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당 태종이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獎)을 양국에 보내 알아듣도록 타일렀다. 임금이 표문을 올려 사죄하였다. 왕자 융(隆)을 태자로 삼았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 《삼국사기》<백제본기> -의자왕-

    드디어 태자 효(孝)와 함께 북쪽 변경으로 달아났다. 소정방이 성을 포위하자 임금의 둘째 아들 태(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병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 《삼국사기》<백제본기> -의자왕-


    또한 '《한서》 <왕망전>'에 따르면 '대부인(大夫人)'은 정실 부인이면서 세자를 둔 부인을 말한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태자는 어디까지나 부여융이고 부여효는 잘못되었다고 부정하지만 신라인과 당나라 사람들은 부여효를 태자라고 여겼다.

    또한 《일본서기》에 은고를 의자왕, 부여융, 그 외 좌평들이 당나라로 잡혀간 원인이 '아마도 이것은 까닭 없이 무기를 들고 다닌 징험일 것이다.' 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 정적 숙청에 은고와 부여효가 깊게 관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644년에 부여융을 태자로 세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정작 백제 멸망 당시 기록에는 부여융은 그냥 왕자고 부여효가 태자라고 기록되고 있는데, 이 기록 차이를 해석해 의자왕이 태자를 교체했단 설이 있다. 만약 은고가 부여효의 어머니라서 부여효로 태자를 바꾸고 대부인이 된 거라면 '왕비의 전횡'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근거가 될 수 있다. 만약 태자를 교체했다면 태자궁을 화려하게 꾸몄다는 기록이 있는 655년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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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은고 라는 여인으로 알려져있으며 의자왕의 많은 여인들 중 아내로 유일하게 이름이 전해진 인물이나 은고에 대한 사략은 거의 없습니다.

    은고는 금척 이란 책을 통해 살펴보면 용모가 수려하고 자태가 아름다워 의자왕의 마음을 빼앗기 충분했으며 신라의 사주를 받아 의자왕이 폭정하도록 부추기는 등 신라의 입장에서는 충신이나 백제의 역적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녀의 기록은 일본서기가 유일하며 660년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가 멸망하자 소정방이 의자왕과 그의 처 은고, 태자 부여효, 왕자 부여태, 부여융, 부여연 및 대신과 장수 88인, 백성 12,087명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갔다는 기록이 유일합니다.

    또한 일본서기 다른 부분에서 백제는 스스로 망하였다. 하시카시가 요사스럽고 간사한 여자로서 무도해 마음대로 국가의 권력을 횡탈하고 훌륭하고 어진 신하를 죽였기 때문에 이러한 화를 자초했다고 기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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