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검색 이미지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탁월한태양새285
탁월한태양새28523.05.28

무오사화의 전개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한국사에서 무오사화가 무슨 사건이었나요? 그리고 무오사화가 일어나게 된 원인과 전개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55글자 더 채워주세요.
답변의 개수6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8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의제문의 발견, 이극돈의 복수심

    1498년(연산군 4) 7월, 『성종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실록청이 설치되었다. 당상관에 임명된 이극돈(李克墩)은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 중에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이 실린 것을 발견했다. 이를 본 이극돈은 쾌재를 불렀다. 이극돈은 전라감사로 재임하던 시절에 세조비 정희왕후의 상을 당했는데, 이때 국장에 쓰일 향을 바치기는커녕 기생을 끼고 놀기에 바빴다. 뇌물을 받았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런데 모든 비리를 사관이었던 김일손이 사초에 낱낱이 기록했다. 이극돈은 이 사실을 후에 알고 김일손을 찾아가 기록을 삭제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김일손은 청을 받아주지 않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김일손에게 당한 수모를 언젠가 되갚아 주리라 생각하고 있던 이극돈에게 조의제문의 발견은 복수를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조의제문은 김종직이 1457년(세조 3)에 여행 도중 여관에서 지은 글로,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초희왕(楚懷王) 의제(義帝)를 조문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것은 세조를 항우에, 단종을 의제에 비유한 것으로, 세조가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것을 은근히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당대의 왕인 연산군이 세조의 자손인데다 당시의 훈구파 역시 세조의 계유정난에 참여한 공신의자손임을 고려할 때 조의제문의 내용은 파란을 예고하기에 충분했다. 또한 이를 사초에 수록한 김일손 역시 혐의를 피하기 어려웠다.

    이극돈은 실록청 총재관 어세겸(魚世謙)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연산군에게 보고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어세겸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경로를 바꾸어 유자광을 찾아갔다. 이에 적극 동조한 유자광은 세조를 비방한 김종직을 대역죄로 다스리고 관계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유자광이 누구인가. 그는 서얼 출신으로 비록 신분이 미천했으나 처세술과 임기응변으로 한계를 극복한 인물이었다. \
    부윤을 지낸 유규(柳規)의 서자로 1439년(세종 21)에 태어난 유자광은 이시애의 난 때 세조에게 발탁되었다. 그리고 예종 때 남이의 옥 사건이 일어나자 그를 고발해 공신에 책봉되었다. 그렇게 훈구파의 일원으로 합류한 유자광은 김종직과는 악연이었다. 성종 때 그가 남도 지방을 유람하다가 함양에 간 적이 있었다. 이곳에서 주변 경관이 주는 감흥에 젖어 객사 현판에 자신의 시액(詩額)을 걸어두었다. 그런데 훗날 함양군수로 부임한 김종직이 유자광의 시액을 보고는 “자광이 어떤 자이기에 이런 맹랑한 짓을 한단 말인가? 당장 불태워버려라”라며 불호령을 내렸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유자광은 분하고 원통했지만 도리가 없었다. 사림파의 영수이자 성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던 김종직에게 대항할 수는 없었다. 속으로 분을 삭인 그는 도리어 김종직의 문인을 자처하며 교유하는 처세술을 발휘했다. 그리고 김종직이 죽었을 때는 제문을 지어 애도하기까지 했다.

    유자광의 '상소', 연산군의 분노에 불을 지피다

    그러나 유자광의 마음 한구석에는 김종직에 대한 복수의 마음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극돈으로부터 조의제문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유자광은 마침내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이렇듯 훈구파인 이극돈과 유자광의 개인적인 감정에서 시작된 조의제문 파문은 사림파를 정치적으로 일망타진하려는 계략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유자광의 「상소」는 연산군의 의중에 부합했다.

    유자광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구절마다 풀이해서 아뢰기를 “이사람이 감히 이러한 부도한 말을 했다니, 청컨대 법에 의해 죄를 다스리시옵소서. 이 문집과 판본을 다 불태워버리고 간행한 사람까지 아울러 죄를 다스리시기를 청하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어찌 이러한 마음 아픈 일이 있단 말이냐. 의의(議擬)해 아뢰도록 하라. 국가에서 종친에게 그 녹(祿)을 잃지 않게 하니, 그 은혜가 막중하거늘, 이총(李摠)은 조관(朝官)들과 결탁해서 장차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만약 종친이라 해서 그 죄를 다스리지 아니한다면 여러 종친이 어찌 경계할 줄을 알겠느냐. 형장 심문을 하도록 하라” 했다.


    - 『연산군일기』 30권, 연산군 4년 7월 15일
    사실 연산군에게 두려운 존재는 훈구파가 아닌 사림파였다. 자신에게 학문을 강요하고 사사건건 간쟁을 일삼는 사림파의 태도가 항상 불만이었다. 연산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무자비하게 사림파를 탄압했다. 곧바로 관련자들을 심문하기 위한 국청이 설치되었고, 총책임자에 유자광이 임명되었다. 김일손은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세조의 집권을 부당하게 생각했던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더 나아가 계유정난 때 고신(告身)을 추탈당한 뒤 낙안의 관노가 되었다가 사사된 정분(鄭苯)을 정몽주에 비기는가 하면, 단종을 보필하다 격살된 황보인과 김종서의 절개를 높이 평가했다. 이는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할수 없는 말이었다.

    한편 훈구파는 조의제문을 빌미로 사림파 전체에 타격을 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곧 연루자의 범위를 김종직의 문인 집단으로 확대시켰다. 이에 이목(李穆)・임희재(任熙載)・이원・표연말・홍한(洪澣) 등이 줄줄이 국문을 당했다. 이들은 모두 평소 김종직을 칭송하고 훈구파를 공격하던 인물이었다. 결국 국문 끝에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은 부관참시되고, 사초를 기록한 김일손은 능지처참되었다. 또한 권오복·권경유(權景裕)·이목·허반(許盤) 등은 파당을 만들어 선왕을 무고했다는 죄목으로 참형에 처했다. 이 밖에 수많은 인사가 곤장을 맞고 유배되거나 좌천되었다. 이 사건이 1498년(연산군 4)인 무오년 7월에 일어난 무오사화다.
    무오사화 이후 사림파의 기세는 크게 위축되었다. 훈구파의 독단과 비리를 견제하고 청신한 정치 풍토를 추구하던 사림이 축출되자 조정은 다시 훈구파의 독무대가 되었다. 한편 사화의 발단이 되었던 이극돈은 유순(柳洵)・윤효손(尹孝孫)・어세겸(魚世謙) 등과 함께 수사관(修史官)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면되었다. 반면 「상소」를 올리고 국문을 주도했던 유자광은 점점 위세가 등등해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무오사화 (조선왕조실록2, 2015. 7. 15., 이성무)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무오사화는 1498년 김일손 등 신진사류가 유자광 중심의 훈구파에게 화를 입은 사건입니다.

    4대 사화 중 첫번째로 일어난 사건이며 사초문제가 발단으로 무오사화라고 합니다.

    성종은 조선건국 이후 중앙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세력을 견제하고 당시의 사회개혁을 위해 김종직을 비롯한 신진사류를 등용했는데 이들은 절의를 중시하여 단종을 폐위하고 살해한 세조와 그의 공신들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고, 세조의 공신들을 제거하기 위해 계속 상소했습니다. 반격을 노리던 훈구파는 성종에 이어 연산군이 즉위해 성종실록을 편찬하기 위한 실록청을 설치하고 이극돈을 당상관으로 임몀하자 신진사류였던 김일손이 기초한 사초를 문제삼았고 그것은 그의 스승이었던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으로 중국사에서 항우가 초나라의 의제를 폐한 것과 단종을 폐위해 죽인 사건을 비유해 간종을 조위한 글이었습니다.

    이극돈은 세조의 신임을 받언 유자광, 노사신, 윤필상 등과 모의해 김종직이 세조를 비방한 것은 대역부도한 행위라 계를 올렸고 이에 연산군은 이 사건이 모두 김종직의 교사에 의해 나온것으로 결론 짓고 김종직을 대역죄로 부관참시하고 김일손을 비롯한 많은 신진사류를 죽이거나 유배했습니다.

    이후 유자광의 세력은 더 커지고 신진사류는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무오사화(戊午士禍)는 1498년(연산군 4년) 음력 7월 유자광과 연산군이 김일손 등의 신진세력인 사림파를 제거한 사화이다.


  •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무오사화(戊午士禍)는 1498년(연산군 4년) 음력 7월 훈구파가 사림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한 사건입니다.

    아래의 전개과정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302400&code=kc_age_30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무오사화의 전개는 크게 두 단계로 진행되었다. 첫 단계는 김일손의 사초가 문제가 되어 그 내용이 논란을 일으킨 단계이며, 두 번째 단계는 김일손의 사초를 논란하던 중에 그 속에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발견되고, 그것이 세조를 비난하는 반역으로 규정되면서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다.

    -출처:우리역사넷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의제문(弔義帝文)」은 김종직이 1457년(세조 3년) 10월 밀양에서 경산으로 가다가 답계역(踏溪驛)에서 잠을 잤다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꿈속에 신선이 나타나서 자신은 회왕이며 항우에게 살해되어 빈강(彬江)에 버려졌다고 말하고 사라졌습니다. 감종직은 꿈에서 깨어난 후 “역사를 살펴보면 시신을 강물에 버렸다는 기록이 없으니 정말로 항우가 사람을 시켜서 회왕을 죽이고 시체를 강물에 버린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제야 글을 지어 의제를 조문한다”라고 하여 제문을 짓는 경위를 밝혔습니다.

    이 글은 1492년(성종 23년) 김종직이 죽고 6년 후인 1498년(연산군 4)에 그 제자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이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할 때 사초(史草)에 실었습니다. 당시 실록의 편찬 책임자는 이극돈(李克墩, 1435~1503)이었는데, 김일손의 사초 중엔 그가 춘추관 사관 시절 때 저지른 비행도 들어 있었습니다. 이극돈은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김일손에게 빼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김일손이 이를 거절하였고, 이로 인해 이극돈을 비롯한 훈구 세력들은 김일손에 대한 불만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극돈은 「조의제문」이 사초에 실린 것을 발견하고 이를 유자광(柳子光, ?~1512)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유자광은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즉위한 세조를 비난한 글이라 해석하여 문제 삼았습니다. 훈구 세력들은 이를 빌미로 김종직 일파를 세조에 대한 불충(不忠)의 무리로 몰아가며 옥사(獄事)를 일으켰습니다. 이 때 사림파의 영수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고 김일손⋅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수(李穗) 등은 사형을 당했으며, 김굉필(金宏弼, 1454~1504)⋅정여창(鄭汝昌, 1450~1504)⋅박한주(朴漢柱) 등은 유배되었습니다. 이것이 1498년(연산군 4년)에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史禍)입니다.

    무오사화는 사초가 발단이 되어 일어난 사화(史禍)로, 조선 시대 4대 사화 가운데 첫 번째 사화입니다. 이 사화로 인해 사림으로 대표되는 신진 사류는 다수가 희생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사기도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사림들은 무오사화, 갑자사화(甲子士禍), 기묘사화(己卯士禍), 을사사화(乙巳士禍) 등 큰 사화를 여러 차례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림은 서원(書院)과 향약(鄕約)을 기반으로 성장을 계속해 다시 중앙 정계에 진출하였고, 선조(宣祖, 재위 1567~1608) 대에는 정계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