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남자들도 귀걸이를 했었나요.
TV 사극을 보다보면 옛날 사람들도 귀걸이를 했던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정말 옛날 조선시대에도 남자가 귀걸이를 했었는지 알고 싶어요.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귀걸이가 아니라 귀고리가 맞을 겁니다. 귀걸이가 귓바퀴에 거는 형태의 장신구, 또는 귀마개처럼 귀에다 걸치는 물건을 의미하는 거라면요. 반면 귓불에 구멍을 뚫어 꿰는 장신구는 귀고리지요.
귀에 귀고리를 하는 관습은 남녀 불문하고 조선시대 초기까지 많이 유행했다고 합니다. 조선 중기 윤국형의 수필집 <문소만록>에는 "나라의 풍속에 남녀가 어릴 때 귀밑에 구멍을 뚫고 귀고리를 드리우는 습속이 전래되었으되 아직 이를 고치지 않았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선조 때에 이르라 이것이 오랑캐의 풍습이라 하여 금지시켰다네요. 게다가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얼굴, 몸, 머리카락 등등은 부모께서 주신 것이니 감히 훼손하거나 상처내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다)라는 유교 윤리에도 맞지 않았고요. 그래서 남자들은 거의 귀고리를 하지 않게 되었고, 여자들도 의식 때에만 귓바퀴에 거는 귀걸이를, 그것도 아주 단조로운 형태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요새 <선비와 피어싱>이라는 책이 나와서 그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는 듯합니다. 저도 읽어보진 않았습니다.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울 은평구 뉴타운 발굴현장에서 5000여기의 무덤이 발굴되었으며 대부분은 조선시대 무덤이었습니다. 이 중 한 무덤에서 수습한 유물에 은 귀걸이 한쌍과 백자 술병 ,은제 어패(임금이 하사한 증폐로 24시간 눈을 뜨고 백성을 지키라는 의미의 임금이 관리에게 내리는 부신)가 출토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은 귀걸이의 주인은 관리를 지낸 남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금 은은 본국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므로.....사대부 자손들의 귀걸이 등을 제외하고 일절 사용을 금하며...."(세종실록 1월6일)
중종 실록에 양평군을 사칭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양평군은 연산군의 후궁소생으로 이미 죽었는데 양평군을 사칭하고 다닌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양평군을 사칭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양평군의 나이 9세 때 큰 진주귀걸이를 달았다."는 기록에 따라 귓볼 구멍의 여부를 통해 양평군인지를 구분했던 것입니다.
임진왜란 와중 조선인과 일본인과의 구별을 귀걸이를 달기위해 귓볼을 뚫은 흔적으로 구분했다고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양반, 사대부, 평민 심지어 군인 조차 귀를 뚫었습니다. 조선시대 남자들이 귀를 뚫는 것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보편적인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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