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이괄의 난을 일으킨 이괄은 어떠한 인물이었는지 궁금합니다
1,624년 인조 반정이 일어난지 1년 만에 이괄의난이 일어나는데요. 이 이괄의 난으로 조선 조정을 상당히 고전하였습니다 이괄는 어떠한 인물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괄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었습니다.
인조반정으로 반정공신이 되었다가 너무 큰 권력을 손에 얻게 되자 난을 일으킨 군인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의 무신ㆍ반란자. 자는 백규(白圭). 본관은 고성(固城). 참판(參判) 육(陸)의 후손. 무과에 급제, 선조 때 형조 좌랑ㆍ태안 군수(泰安郡守)를 역임, 1622년(광해군 14) 함북 병마절도사가 되어 부임하기 직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가담하여 이듬해 거사일의 작전 지휘를 맡아 반정을 성공케 했다. 이해 후금(後金 : 청(淸))과의 마찰로 변방에서 분쟁이 잦자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부원수(副元帥)로 발탁되어 영변(寧邊)에 출진(出鎭), 성책(城柵)을 쌓고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국경 경비에 힘썼으며, 이어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624년(인조 2) 아들 전(旃)이 당시의 일부 지식층과 교유하며 공신들의 횡포로 인한 시정(時政)의 문란을 개탄한 사실이 과장되어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무고를 받았다. 우선 그의 아들 전을 잡아 사실 여부를 조사 한다는 명목으로 조정에서 선전관(宣傳官) 및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영변의 군영에 보내자, 무능하고 의심증 많은 공신들에 대한 평소의 적개심이 폭발, 공신들의 제거를 이유로 난을 일으켰다. 이 때 같은 반역 음모에 관련된 혐의로 서울에 압송되던 구성부사(龜城府使) 한명련(韓明璉)을 구출, 서로 제휴하여 군사 1만 2천여 명을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했다. 막강한 군대와 탁월한 작전으로 관군을 차례로 격파하자 인조는 공주(公州)로 피난, 서울을 무혈 점령했다. 흥안군(興安君) 제(瑅)를 왕으로 추대하고 백성을 진무(鎭撫)했으나 입성 이튿날 장만(張晚)이 거느린 관군과 길마재(鞍峴)에서 결전했다가 참패하여 수하 참모와 함께 수구문(水口門)을 거쳐 이천(利川)으로 도망했다. 묵방리(墨坊里)에서 부하 장수 기익헌(奇益獻)ㆍ이수백(李守白)에게 목이 잘리어 죽고 난은 평정되었다. 그의 반란은 뒤에 정묘호란(丁卯胡亂)의 한 원인이 되었다.
출처 : 인명사전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587년 ~1624년 조선 중기의 무신, 반란자 로 본관은 고성, 자는 백규, 병조참판 이육의 후손입니다.
선조때 무과에 급제한 후 형조좌랑, 태안군수를 지냈고 1622년 함경북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임지로 떠날 준비를 할 즈음 평소 친분이 있던 신경유의 권유로 광해군을 축출하고 새 왕을 추대하는 계획에 가담해 1623년 3월 인조반정 때 큰 공을 세웠으나 반정 과정에서 주도 세력인 거의대장 김류의 우유부단찬 처사에 크게 반발하면서 불화가 생겨 반정 뒤에 겨우 한성부판윤이 되자 불만이 많았습니다.
1623년 포도대장을 지낸 뒤 평안병사 겸 부원수에 임명, 평안도 영변에 출진해 군사 훈련에 힘쓰는 한편 그 지방의 성책을 보수해 진의 방비를 엄히 했으며 이는 당시 후금과의 국제 관계가 긴박해지면서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고 이해 윤10월 반정에 참가한 공신들의 공훈을 책정할 때 정사공신 2등의 첫째가 되었습니다.
1624년 정월 외아들 이전, 한명련, 정충신 , 기자헌, 현집 , 이시언 등과 함께 반역을 꾀한다는 무고를 받았고 이어 서울에서 건전관과 의금부도사 등이 이괄의 군중에 머물던 아들 이전을 붙잡아 사실 여부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영변에 내려오자 이들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으며 신속한 행군으로 한때 서울을 점령, 기세를 떨쳤으나 곧 관군에 대패해 피신 중 부하 장수에게 살해되었습니다.
무과 출신이었으나 문장과 서예에도 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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