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박해와 병인박해의 차이는 어떤점이 있는지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유박해 (순조, 1801)
1) 노론 벽파가 남인 시파를 축출하며 정치적으로 박해 → 시파 위축, 실학 쇠퇴
2) 이승훈, 이가환, 정약종 (남인), 청나라 신부 주문모 = 사형 / 정약전, 정약용 = 유형
3) 황사영 백서사건 발생 - 북경 프랑스 주교 주교에게 북경의 군대를 동원해 조선의 신앙과 포교의 자유를 보장받게 해달라는 서신이 발각 → 탄압이 심해짐 (X-로마주교)
4) 조선 교구의 설립 (1831)
병인박해 (고종, 1866)
1) 최대의 박해
2) 프랑스 신부 9인, 남종삼 등 수천명 순교 → 프랑스의 침입, 병인양요 발발의 구실.
-출처:티스토리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유박해(辛酉迫害)는 1801년(순조 1년)에 발생한 조선의 천주교회 박해 사건이다. 시파·벽파의 정치 투쟁에서 시파의 제거를 오랜 숙원으로 한 벽파가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일으킨 사건이다.
원인
1800년 6월 28일 신해박해 이래 “정도(正道)인 유학은 ‘사학’(邪學)인 천주교를 소멸시킬 것”이라면서, 천주교에 대해서 온화한 정책을 써 오던 정조가 승하였다.
1800년 7월 4일 순조가 11세로 왕위에 오르면서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여[2]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벽파가 정순왕후를 움직이면서 조선 천주교회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박해의 진짜 이유는 남인·시파의 숙청이었다. 야당인 남인 중에서 천주교 신앙을 가진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결과
이 사건으로 중국인 천주교 신부이자 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인 주문모를 비롯하여 이승훈, 정약종(다산 정약용의 형), 여성 평신도 지도자인 강완숙 등이 사형당했고, 한때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지만 이념의 차이로 멀리한[3] 정약용 등은 귀양보내져 박해 피해자는 수백 명에 달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오가작통법을 통해 다섯 집 중 한 집에서 천주교 신자가 적발되면 모두 처벌하는 가혹한 연좌제를 실시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애꿎은 피해를 보았다. 이 옥사로 만 1년 내외에 박해 받아 죽은 신도만도 300명이 넘었다.
영향
1801년 10월 5일 정약종의 조카 사위였던 천주교 신자 황사영(黃嗣永)이 조선에서는 천주교를 정치적 숙청에 이용한다면서 신유박해의 실상과 대응 방안을 적어 청국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던 밀서(密書)가 발각되었는데, 이를 황사영 백서 사건이라고 한다.[4] 당시 황사영은 청나라의 무력을 빌어 조선의 종교적 자유를 얻고자 했기 때문에, 조선 천주교회는 박해를 받게 되었다.
병인박해
병인박해(丙寅迫害)는 1866년(고종 3년)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 정권의 대규모의 천주교 탄압을 말한다. 병인사옥(丙寅邪獄)이라고도 하며, 당시 6천여 명의 평신도와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의 선교사 등이 처형된 사건이다.
이 사건을 빌미로 병인양요가 발발하게 되지만 기독교가 군대, 상인과 함께 제국주의 열강들의 무기였다는 사실을 생각해본다면 조선의 천주교 박해는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