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검색 이미지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보름달빵단팥빵
보름달빵단팥빵23.08.02

절이 산속으로 들어간 이유가 무엇인가요?

우리나라 유구한 역사를 보면 절이 대부분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속세와 인연을 끊고 깊은 산속에 자리를 잡았는데 교회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도심에 자리를 잡았더군요. 근데 왜 절만 산속으로 들어간 이유가 있나요?

55글자 더 채워주세요.
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02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숭유보다는 억불에 초점이 있으며 배불(排佛)이라고도 합니다.

    유교를 건국이념이자 통치사상으로 숭상한 조선왕조에서 전대 왕조인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를 억압한 정책입니다.

    숭유억불 중 산지로 사찰 강제 이전/도시 내 사찰 폐쇄된 사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 이전에 절은 산기슭만이 아니라, 지금의 성당이나 교회와 같이 도시의 길거리에 흔히 있는 시설이었습니다. 경주시에 있는 황룡사니 분황사니 사천왕사니 하는 큰 절 유적은 대부분 평지에 자리를 잡았다. 이런 절들을 산중턱으로 보내면 접근성이 떨어져 자연히 신도가 줄고, 시주도 줄어들어 규모가 쪼그라들고 세력확장이나 정치세력과 야합하기가 어려워집니다. 한국의 절들이 대체로 산에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렇게 남은 산사들은 중국이나 일본 등 다른 나라의 불교와 다른 형태로 자리잡았고, 그 독창성을 인정받아 2018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되었다. 유네스코도 한국 특유의 산사가 형성된 과정을 설명하며 조선왕조가 도시사찰을 없애는 일 등 숭유억불 정책을 언급했습니다. 도심지역 사찰 건물과 부지는 대개 향교로 재사용되었습니다. 고령향교나 부여향교의 건물에는 불교 특유의 연꽃 무늬가 새겨진 삼국시대 주춧돌이 쓰였다. 한편 승려의 신분이 낮아졌고 산에 산다는 이유로, 선비들이 행차할 때 산에서 잡일 일꾼이 필요하면 승려를 강제로 차출했습니다. 조선시대 문인들이 금강산 등 명산을 유람하면 그 산에 있는 승려들을 가마중으로 차출해서 선비들이 앉은 가마를 어깨에 지고 산을 올랐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의 숭유억불 정책때문입니다.

    당시 유교를 숭배했기 때문에 불교는 탄압당했고 이에 많은 절들이 산속으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시대 숭불책으로 불교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 함께 있었으나 조선은 숭유억불책으로 유학인 성리학을 학상하고 불교를 억압하고 배척했기 때문에 탄압을 피해 산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절이 주로 산에 있게 된 까닭은 조용하여 수행을 하기 좋기 때문입니다. 각종 소음이 들리는 도심이나 마을에서 사회의 모든 향락을 뿌리친 채 자신을 갈고 닦는 공부를 하기란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 입니다. 절의 ㅅ님들은 속세를 벗어나 모든 것을 잊고 해탈을 하는 것이 목적이기에 더욱 더 조용한 곳이 필요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