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숭유보다는 억불에 초점이 있으며 배불(排佛)이라고도 합니다.
유교를 건국이념이자 통치사상으로 숭상한 조선왕조에서 전대 왕조인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를 억압한 정책입니다.
숭유억불 중 산지로 사찰 강제 이전/도시 내 사찰 폐쇄된 사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 이전에 절은 산기슭만이 아니라, 지금의 성당이나 교회와 같이 도시의 길거리에 흔히 있는 시설이었습니다. 경주시에 있는 황룡사니 분황사니 사천왕사니 하는 큰 절 유적은 대부분 평지에 자리를 잡았다. 이런 절들을 산중턱으로 보내면 접근성이 떨어져 자연히 신도가 줄고, 시주도 줄어들어 규모가 쪼그라들고 세력확장이나 정치세력과 야합하기가 어려워집니다. 한국의 절들이 대체로 산에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렇게 남은 산사들은 중국이나 일본 등 다른 나라의 불교와 다른 형태로 자리잡았고, 그 독창성을 인정받아 2018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되었다. 유네스코도 한국 특유의 산사가 형성된 과정을 설명하며 조선왕조가 도시사찰을 없애는 일 등 숭유억불 정책을 언급했습니다. 도심지역 사찰 건물과 부지는 대개 향교로 재사용되었습니다. 고령향교나 부여향교의 건물에는 불교 특유의 연꽃 무늬가 새겨진 삼국시대 주춧돌이 쓰였다. 한편 승려의 신분이 낮아졌고 산에 산다는 이유로, 선비들이 행차할 때 산에서 잡일 일꾼이 필요하면 승려를 강제로 차출했습니다. 조선시대 문인들이 금강산 등 명산을 유람하면 그 산에 있는 승려들을 가마중으로 차출해서 선비들이 앉은 가마를 어깨에 지고 산을 올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