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말 약 13년간 우리나라가 청나라의 제후국과 같은 위치에서 벗어나 자주독립국임을 내외에 선포했을 때 내세운 나라이름. 이제껏 쓰던 청나라의 연호를 버리고 독자적으로 광무(光武)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임금의 칭호도 대왕에서 황제로 격상하는 이른바 건원칭제(建元稱帝)를 단행했다. 황제권을 강화하고 자위군대의 강화에 역점을 둔 광무개혁이 이루어졌으나, 대내적으로는 독립협회와 황국협회가 충돌을 빚고, 친일파와 친로파가 투쟁을 벌이는 등 나라꼴이 심히 어지러운 가운데, 러·일전쟁이 일어나(1904) 일본이 승리함에 따라 을사보호조약(1905)이 강압적으로 체결되고, 고종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보호조약의 폐기를 열국에 호소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일본의 강요로 퇴위했다.
이어 순종이 즉위하여 융희(隆熙) 연호를 사용하고, 일본의 한국침략에 맞서 전국의 의병항쟁이 일어났으며, 1909년 10월에는 한국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안중근 의사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그러나 한국민의 이러한 항쟁에도 불구하고 열국의 묵인 내지 동조를 업은 일본의 집요한 야욕으로 1910년 8월 29일 한·일 합방조약이 공포됨으로써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출처 : 한국근현대사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