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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범한앵무새123
비범한앵무새12323.09.26

유관순님에 대해 궁금합니다..

역사적 위인하면 유관순님이 빠지지 않고 나오시는데 정확하게 나라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단순히 고문을 버티며 대한독립을 외친걸로 위인이 된거라면 좀더 실질적이게 일본 간부 암살에 참여한 무명의 독립열사가 더 위인인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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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9.27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화학당 고등 1년생일 때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고 고향으로 돌아와 교회와 청신학교를 찾아다니며 만세 시위를 전개할 것을 권유하였습니다. 마을 지도자, 교회, 유림계를 규합하여 3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할 것을 추친했습니다. 만세 시위 주동자로 잡혀 일제의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굴하지 않았습니다. 경성복심법원에서 재판 받을 때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일제의 한국 침략을 규탄, 항의하며 일제법관에게 재판받음이 부당함을 역설하였습니다. 그리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독립 만세를 여러번 고창하였고, 그 때마다 모진 악형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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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화학당 고등과 1년생이었던 유관순은 만세시위에 참가, 연이어 3월 5일 서울의 만세시위에 참가, 그 뒤 총독부가 임시휴교령을 내려 이화학당이 폐교하자 3월 8일 열차편으로 천안으로 돌아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유관순은 교회와 청신학교를 찾아다니며 서울에서의 독립 시위운동 상황을 설명, 천안에서도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권유, 이러한 노력으로 조인원, 김구응 등이 연기, 청주, 진천 등지의 개신교 교회와 유림계를 규합해 4월 1일 아우내 장날을 기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계획, 군중을 모았으며 당일 모인 수천명의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맹렬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습니다.

    1919년 3월 당시 천안군 목천면에서는 이종성 등의 주동으로 3.1운동 만세 운동에 호응하는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나 사전에 구금당해 실행되지 못했고, 유관순은 부친 유중권의 주선으로 3월 9일 밤 교회 예배가 끝난 뒤 마을 속장 조인원 , 지역 유지 이백하 등 20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경성의 상황을 설명, 이어 4월 1일 아우내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고 안성, 목천 연기, 청주, 진천 등의 마을 유지와 유림계를 규합하기 위한 연락원의 한 사람이 되어 다른 연락원들과 함께 인근 지역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상대로 시위운동 참여를 설득했습니다.

    4월 1일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조인원의 선도로 시위가 시작되자 유관순은 시위대 선두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였고 주동자로 일제 헌병에 붙잡힌 유관순은 미성년자인 점을 감안해 범죄를 인정하고 수사에 협조하면 선처하겠다는 제안을 거절, 이후 협력자와 시위 가담자를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유관순은 천안경찰서 일본 헌병대에 투옥되었다가 곧 공주경찰서 감옥으로 이감, 공주지방법원에서 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았으며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의 1심재판에서 소요죄 및 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후 상고를 포기, 유관순은 경성복심법원 재판 당시 일제의 한국점령을 규탄, 항의하며 조선총독부 법률은 부당한 법이며 그에 따라 일본 법관에 의해 재판을 받는 것은 부당함을 역설했습니다.

    유관순은 서대문형무소 복역 중 옥안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해 고문을 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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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1.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화학당 고등 1년생일 때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2. 고향으로 돌아와 교회와 청신학교를 찾아다니며 만세 시위를 전개할 것을 권유하였다.

    3. 마을 지도자, 교회, 유림계를 규합하여 3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할 것을 추친했다.

    4. 만세 시위 주동자로 잡혀 일제의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하지 않았다.

    5. 경성복심법원에서 재판 받을 때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일제의 한국 침략을 규탄, 항의하며 일제법관에게 재판받음이 부당함을 역설하였다.

    6. 서대문형무소에서 독립 만세를 여러번 고창하였고, 그 때마다 모진 악형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았다.

    간부 암살이나 독립자금을 대주는 의사 열사들이 있지만 유관순 열사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만세 운동을 적극 전개하고 견디기 힘든 고문까지 견뎌내시며 일제탄압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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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유관순 열사는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3.1운동으로 시작된 만세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다가 일본 형사들에게 붙잡혀 서대문 형무소에서 이뤄진 모진 고문으로 순국했습니다. 어린 소녀의 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모진 고문을 견뎌낸 유관순 열사의 독립정신에 경의를 표하며 끝까지 일제에 굴하지 않고 순국한 것에 대해 높은 평가가 내려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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