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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maan
rogermaan23.07.14

선조 임금 시절 발생한 정여립의 모반 사건은 어떠한 내용인지 궁금합니다

조선 중기 선조 시대의 문신이었던 정여립이 일으킨 정여립의 모발 사건으로 기축옥사까지 연결이 되는데요 정여립은 어떤 인물이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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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의 모반자(謀叛者). 자는 인백(仁伯). 본관은 동래(東萊). 성격이 사납고 잔인했으나 통솔력이 있고 두뇌가 명석하여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하였다. 1570년(선조 3) 문과(文科)에 급제, 이때부터 이이(李珥)ㆍ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스승의 총애를 받았으며, 1583년(선조 16) 예조 좌랑(禮曹佐郞)이 되고, 이듬해 수찬(修撰)으로 사직했다. 본래 서인(西人)이었으나 1585년 다시 수찬이 된 뒤 집권 중인 동인(東人)에 아부하여 죽은 이이를 배반하고 박순(朴淳)ㆍ성혼 등을 비판, 왕이 이를 불쾌히 여기자 다시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 후 많은 선비들과 접촉하여 점차 성망(聲望)이 높아지자 정권(政權)을 잡기 위해 진안(鎭安) 죽도(竹島)에 서실(書室)을 지어 놓고 대동계(大同契)를 조직, 신분에 제한없이 선비ㆍ불평객들을 모아 보름마다 한 번씩 무술을 훈련시켰다. 1587년(선조 20) 전주 부윤(全州府尹) 남언경(南彥經)의 요청으로 변경에 침입한 왜구(倭寇)를 격퇴한 뒤 대동계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 황해도 안악(安岳)의 변숭복(邊崇福)ㆍ박연령(朴延齢), 해주(海州)의 지함두(池涵斗)ㆍ송익필(宋翼弼)ㆍ운봉(雲峰)의 중 의연(義衍) 등의 기인(奇人)ㆍ모사(謀士)를 휘하에 넣고 《정감록(鄭鑑錄)》의 참설(讖說)을 이용하는 한편, 이적(異跡) 등을 조직하여 이씨(李氏)가 망하고 정씨(鄭氏)가 흥한다고 소문을 퍼뜨리며 민심을 선동하였다.

    1589년(선조 22) 소문이 점차 퍼져 비밀이 누설되자 거사를 모의, 부서(部署)를 정하고 한강의 결빙(結氷)을 이용하여 황해와 호남에서 동시에 입경(入京)하여 대장(大將) 신립(申砬)과 병조 판서를 살해함으로써 병권(兵權)을 잡을 것을 계획했다. 이 때 안악 군수(安岳郡守) 이축(李軸)이 이 사실을 듣고 재령 군수(載寧郡守) 박충간(朴忠侃), 신천 군수(信川郡守) 한응인(韓應寅)과 함께 고변(告變)하여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히자 금구(金溝)의 별장(別莊)을 떠나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진안 죽도로 도망하여 숨었다가 관군의 포위 속에서 자살, 모반 사건(謀叛事件)은 끝났다. 이 사건으로 동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어 기축옥사가 일어났으며, 전라도를 반역향(叛逆鄉)으로 하여 호남인들의 등용이 제한되었다.

    출처 :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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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여립은 천하는 공물이니 어찌 주인이 따로 있으리요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공화 사상을 생각했던 사상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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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여립(1546년 ~ 1589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 사상가로 이이와 성혼의 문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홍문관 수찬 등을 역임했으나, 과격한 의논과 성격으로 서인과 동인간의 갈등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국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했다는 이유로 선조의 화를 돋구게 되고 결국 낙향하여 은거하며 학문을 연구했습니다.

    그는 대동계를 결성하여 왜구 토벌에 앞장섰으나, 역모를 꾸몄다는 고변으로 쫓기다가 자살하였다고 합니다. 그의 죽음은 '기축옥사'라고 불리는 대규모의 정치적 탄압으로 이어졌으며, 동인가 몰락하고 서인가 득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 답변이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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