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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매미372
젊은매미37223.05.22

발해사는 연구결과가 많이 없는데

발해사 연구 관련해서는 그 결과가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발해사는 우리나라의 역사가 맞다고 봐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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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발해는 전성기에 사방 5,000리에 달하는 영토를 가졌습니다. 서쪽으로는 요하까지, 북쪽으로는 쑹화강과 헤이룽강까지 이르는 지역을 아울렀고, 동쪽으로는 러시아 연해주 지역을, 남쪽으로는 대략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선에서 신라와 접하였습니다. 오늘날 국가로 따진다면 한국, 중국, 러시아에 걸쳐 있었던 나라입니다. 따라서 이 3국에서 발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며, 발해 당시 교류가 빈번하였던 일본에서도 상당한 연구가 이뤄졌습니다.


    한국의 발해사 연구는 조선 후기에 처음으로 실증적인 연구가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발해사에 대한 관심은 영토적인 문제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연구는 자연히 지리 고증에 집중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은 정약용 · 한치윤 · 한진서 등입니다. 그리고 유득공의 『 발해고(渤海考)』를 통해 발해를 통일신라와 함께 남북국으로 부르며, 한국사에서 남북국시대를 설정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의 실증적 연구는 19세기 중반부터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도 실증적인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지만, 박은식 · 신채호 · 장도빈 · 권덕규 · 황의돈 등에 의해 발해를 한국사로 이해하는 역사 인식이 발전하였습니다. 광복 이후에는 분단으로 남북한에서 발해사 연구가 별도로 진행되었습니다.


    남한에서는 1960년대부터 동양사 연구자인 이용범이 고구려 계루부와 발해 왕실의 연결 가능성과 발해의 사회 구성 ‧ 유민사 등을 연구하였습니다. 1970년대에는 이우성의 「남북국시대와 최치원」이란 글이 남북국시대론에 대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송기호 · 한규철 · 노태돈 등이 발해사 연구에 참여하였고, 1990년대에는 한규철을 시작으로 송기호 · 임상선 등의 박사논문이 나오며 점차 연구진과 연구 주제가 확대되었습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역사학에서 박진숙 · 김은국 · 김동우 · 김종복 · 이효형 · 김진광 · 권은주 등의 박사논문이 나왔습니다. 이 밖에 신라사나 일본사 연구자를 비롯하여 역사 교육 ‧ 건축 ‧ 복식 ‧ 고고학 분야에서 조이옥 · 구난희 · 윤재운 · 이병건 · 전현실 · 정석배 등 많은 연구자들이 발해사 연구에 참여하였습니다.


    연구 주제는 대조영의 출자와 건국 주체, 주민 ‧ 사회 구성, 지리 ‧ 강역 ‧ 교통, 문화 성격, 발해 인식의 변천, 역사 귀속, 정치 제도, 대외 관계(신라 ‧ 일본 ‧ 당 ‧ 거란 ‧ 말갈 ‧ 북방 민족), 부흥 운동과 유민, 유적과 유물 등 다양합니다. 최근에는 문헌학보다는 고고학 분야의 신진 연구자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북한에서는 1962년에 박시형이 「발해사 연구를 위하여」라는 논문에서 발해가 모든 면에서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명제를 제시한 것이 본격적인 연구입니다. 문헌에 기초를 둔 그의 주장은 주영헌이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함으로써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1970년대 초까지 문헌사와 고고학 두 방면에서 연구의 기본 틀이 마련되었습니다.


    이후 북한에서의 발해사 연구는 한동안 침체를 보이다가 1980년대 후반에 다시 활기를 띠며 연구자가 늘었습니다. 문헌학자로 장국종 · 손영종 · 현명호 · 채태형 · 김혁철 등이 있고, 고고학자로 김종혁 · 리준걸 · 김지철 등이 대표적입니다. 1980년대에는 주체사상이 유일사상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으면서 연구 주제가 고구려의 계승성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한편 함경도에서 발해 유적들이 연이어 확인된 것이 큰 성과입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에는 『발해사1~7-성립과 주민, 정치, 경제, 문화, 역사지리』, 『조선단대사(발해사)』, 『발해사문답』, 『발해정치사연구』, 『발해의 대외관계연구』, 『력사이야기: 발해 및 후기신라편』, 『동해안 일대의 발해유적에 관한 연구』, 『발해교통운송사』, 『대조영과 발해국』 등의 책이 출판되었고, 논문의 수도 많아졌습니다. 문헌학 분야에서는 김성호 · 림호성 · 전동철 · 리진국 · 리춘민 등이 있고, 고고학 분야에는 김창호 · 김남일 · 김대영 · 리창진 · 최춘혁 · 장철만 · 김인철 등의 연구가 확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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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東史』(李種徽, 1803년경)에서 출발하였다. 이 책은 비록 완성된 형태는 아니지만 紀傳體의 형식을 갖춘 최초의 역사서에 해당한다. 그 편목을 보면 삼국 이전의 역사는 本紀로 처리하였지만 삼국은 본기에서 서술되지 않았으며, 부여ㆍ발해ㆍ가야의 역사가 世家로 다루어졌다. 따라서 여기서는 발해를 신라와 대등한 수준으로 인식하지 않았고, 종래와 같이 삼국보다 한 단계 아래인 부여ㆍ가야 등과 동등한 수준으로 이해하였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발해사를 고구려의 속국으로 인식하던 단계에서 나아가 독립된 나라의 역사로서 서술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아주 크다.

    더구나 그는 우리 나라 땅이 발해시기에 최대 판도를 이루다가 고려 이후에 축소되었다고 하면서, 우리 나라가 약한 나라로 전락한 것이 발해의 땅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우리가 찾고자 하는 대상이 고구려 옛 땅에서 발해 옛 땅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앞 시대에 한백겸ㆍ이익ㆍ신경준 등이 우리 나라가 약한 나라가 된 이유를 고구려 영토의 상실로 보면서 발해의 건국을 가리켜 '고구려 영토를 잃었다'고 표현하였던 것과는 크게 다르다. 이들이 발해사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신라 측의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이러한 설명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고구려 땅을 되찾아야 한다는 高句麗故土 회복 의식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종휘는 이와 다르게 발해 땅을 되찾아야 한다는 渤海故土 회복 의식을 표명함으로써 발해사 인식면에서 커다란 전환점을 이루었다.

    이종휘의 발해사 인식은 『東史世家』(洪奭周, 1820년대)에서 더욱 강화되어 나타났다. 홍석주는 발해사를 신라ㆍ고구려ㆍ백제의 역사와 함께 世家로 다루어 삼국과 발해를 동등하게 보았다. 『海東繹史』(韓致奫, 1814년경)와 『海東繹史續』(韓鎭書, 1823)도 역시 이러한 부류에 속한다. 한치윤은 발해사를 世紀로 다루어 신라사와 동등하게 취급하였고, 한진서도 「古今疆域圖」에서 삼국과 함께 발해를 그 대상으로 삼았다. 정약용은 체계적인 역사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발해사 인식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는 內閣親試에서 발해의 땅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의식을 이미 피력한 바 있다. 그의 발해사 인식이 구체화된 것은 『疆域考』(丁若鏞, 1811, 1833)에서이다. 그는 한백겸의 설을 따라 한강을 경계로 하여 북쪽에는 고조선ㆍ4군ㆍ고구려ㆍ발해로 이어졌고, 남쪽에는 3한이 백제ㆍ신라ㆍ가야로 이어진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북방 계열과 남방 계열의 역사를 거의 동등하게 다룬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으로 후자는 『渤海考』(柳得恭, 1784)가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柳得恭은 서문에서 고려가 발해를 신라와 동등하게 다루어 남북국 역사를 썼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여 당시로서는 상당히 혁신적인 의식을 담았다. 이러한 의식은 『大東地志』(金正浩, 1866년경)로 이어졌다. 단군조선에서 고려까지의 역사를 다룬 「方輿總志」에서 발해사를 독립된 항목으로 다루었으며, 「渤海國」에서는 삼한-삼국(신라ㆍ가야ㆍ백제)-삼국(고구려ㆍ신라ㆍ백제)-남북국(신라ㆍ발해)으로 이어지는 독특한 고대사 체계를 제시하였다.

    이상의 두 흐름은 상호 보완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두 흐름이 한 사람에게서 동시에 나타나지 못하고 각기 독립적이었다는 것은 이 당시 발해사 인식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장차 이 두 부류가 하나로 융합되어 고대사 체계가 완성되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초반을 지나면서 더 이상의 진전이 나타나지 못한 채 중단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 후기의 발해사 인식은 미완의 형태로 끝나버림으로써 다음 세기로 과제가 넘겨지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 한껏 고조된 발해사 인식은 비로소 발해사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를 낳게 되었다. 발해사에 대한 관심이 주로 영토적인 데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연구는 자연히 地理考證으로 나타났다. 발해의 지리에 대해서는 이미 『東國地理誌』에서부터 독자적인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여, 『東史會綱』, 『東史綱目』 등으로 이어졌지만, 19세기 초에 丁若鏞ㆍ韓致奫ㆍ韓鎭書에 이르러서 탁월한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특히 『海東繹史續』에 실린 지리고증은 후에 徐相雨를 통하여 중국에 소개되어 『渤海疆域考』(徐相雨 輯, 1925)라는 이름으로 그곳에서 간행됨으로써 청나라 학자들의 관심을 샀다.

    지리고증의 주요 논점은 建國地 및 5京ㆍ15府의 위치, 발해의 서쪽 및 남쪽 경계 문제였다. 건국지에 대해서는 太白山과 東牟山이 과연 어디인가 하는 점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敦化市 부근의 額敦山으로 비정한 정약용의 견해가 현재의 통설에 가장 가깝다. 5경ㆍ15부의 위치 비정은 『遼史』 地理志나 이를 토대로 만들어진 明ㆍ淸 시대의 문헌들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책들은 발해가 마치 遼東지방에 있었던 것처럼 서술하였는데, 그러한 오류가 왜 발생하였는가를 규명하고 이들의 원래 위치를 역시 현재의 통설과 거의 비슷하게 비정한 것이 『疆域考』와 『海東繹史續』이다.

    그리고 서쪽 경계 문제와 관련해서는 요동지방이 과연 발해의 영토였는가 하는 점이었다. 또 남쪽 경계 문제와 관련해서는 세 가지가 거론되었다. 첫째는 대동강 북쪽에서 압록강 남쪽까지가 과연 발해의 땅이었는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신라와의 경계를 이룬 泥河가 어디인가 하는 것이며, 셋째는 『新唐書』에 弁韓이 발해 땅이 되었다고 한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상과 같은 지리고증에서 비교적 과학적인 연구 결과를 남길 수 있었다.

    이렇게 발해사에 대한 인식의 차원을 넘어서 본격적인 학문 연구의 대상으로 끌어올린 것은 중국을 비롯한 주변의 어느 나라보다도 시기적으로 앞선다. 특히 이들이 『遼史』 地理志의 기록에 오류가 많다는 것을 깨닫고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밝힌 것은 당시 중국과 조선을 통틀어 처음으로서, 발해의 지리고증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였다. 따라서 발해사 연구는 조선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증적 연구는 19세기 중반 이후에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상으로 보건대 조선시대의 渤海觀은 15ㆍ6세기까지의 인식이 17세기 초반, 18세기 중ㆍ후반, 19세기 초반을 경계로 획을 그으면서 변화하다가 19세기 중반부터 퇴조해버린다. 각 시기마다 변화를 가져오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17세기 초반의 경우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걸친 여러 차례의 外亂 때문이었으며, 18세기 중ㆍ후반은 18세기 초반에 세워졌던 定界碑를 둘러싼 북방 영토 문제 때문이었다. 특히 이 시기에 들어와 종래의 高句麗故土 회복 의식이 渤海故土 회복 의식으로 전환된 것은 발해사를 적극적으로 우리 역사로 인식한 결과로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발해사 인식은 19세기 중반 이후로부터 장기간 침체 상태를 면치 못하였다. 개화기의 교과서들은 三韓正統論의 영향을 크게 받아 삼국통일을 강조함으로써 발해사 인식은 크게 축소되었다. 이에 따라 발해사를 아예 언급하지 않거나 신라사에 부가하여 간단히 언급하는 수준에 머물렀다.15) 다만 『歷史輯略』(1905)을 편찬하면서 발해사를 비교적 상세히 서술하였던 金澤榮은 나중에 일본측의 발해 사료를 많이 인용하여 『韓國歷代小史』(1922)를 다시 간행한 것이 돋보인다.

    한동안 침체되었던 발해사 인식이 다시 크게 고양된 것은 일제시대 때의 일이다. 특히 民族主義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과 연계되면서 滿洲 지역의 北方史에 커다란 관심을 보이게 되었으니,16) 이러한 모습은 朴殷植, 申采浩, 張道斌, 權悳圭 등에서 찾을 수 있다.

    朴殷植은 『渤海太祖建國誌』(1911)를 발표하였으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아서 그의 발해사 인식을 파악할 길이 없다. 申采浩의 발해사 인식은 『讀史新論』(1908)과 『朝鮮上古史』(1931) 總論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발해사 인식에서 柳得恭과 李種徽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는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미를 격하시키고 발해를 단군ㆍ부여ㆍ고구려의 정통을 계승한 국가로 파악하여 '兩國時代'를 설정하였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실증적 연구와 역사 서술로 이어지지 못하고 史論에 그치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의 삼국통일 평가와 발해사 인식은 훗날 북한의 역사 인식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신채호에게서 영향을 받아 국사 개설에서 남북국시대를 설정하는 예들도 보인다. 張道斌은 『國史』(1916ㆍ1946)에서 '南北國'을 설정하였고, 權悳圭의 『朝鮮留記』(1924)와 黃義敦의 「上古時代」(1943)17)에서 각기 '南北朝'를 설정하였다.

    한편으로 大倧敎 계통에서는 남방사보다 북방사를 높이 평가하면서 만주에서 일어난 단군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을 중시하였으며, 발해 수도 東京城 부근에다가 1933년에 渤海農場을 세워서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민족 정신을 앙양한다는 목적 의식에 사로잡혀 북방사를 지나치게 과장한 면이 보인다.

    일제시대에는 발해에 대한 높은 관심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다만 張道斌의 연구가 눈에 뜨일 뿐이다. 그는 일제시대에 『渤海太祖』(1926)를 발표하였고, 해방 후에도 『大韓歷史』(1959), 『國史槪論』(1959)에서 발해사를 지속적으로 비중 있게 다루었다. 이러한 작업에는 신채호의 영향이 컸으며, 이와 함께 그가 망명지에서 유적을 직접 답사하였던 경험도 크게 작용하였다. 그는 1912년 경에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한 뒤에 우수리이스크(송왕령) 지역의 성터를 답사하여 이곳을 고구려 柵城 또는 발해 東京 소재지로 추정하였다. 이것은 현재의 통설과는 다르지만, 한국인 학자로서는 처음으로 연해주 유적을 답사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아주 크다.18)

    해방이 되면서 발해사 연구는 남ㆍ북한에서 각기 재개되었다. 남한에서는 1960년대부터 李龍範이 연구를 주도하였다. 그는 60년대에 발표된 글들에서 기왕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면서 한국사와의 연결 가능성을 모색하였고, 발해 왕실을 고구려 桂婁部와 연결시켜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70년대에 이르러 발해의 社會構成과 遺民史의 연구에 남다른 업적을 남겼지만, 오히려 발해사를 한국사에 넣는 데에 주저하였던 면도 보인다.19) 이 당시 그의 연구에는 과거 일본인들의 연구 성과가 주요한 토대가 되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들어서 宋基豪, 韓圭哲, 盧泰敦, 金渭顯, 徐炳國, 崔茂藏 등이 참여하였고 이보다 늦게 林相先, 金恩國 등이 뒤를 잇고 있다. 그리고 근년에는 일련의 석사논문들이 발표됨으로써 연구 인력이 점차 확대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연구 분야도 다양화되었다. 역사학 분야에서 대외관계, 유민, 사회구성 등에 관한 연구가 진척되었으며, 중국 측의 고고학 자료도 직접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문학ㆍ음악ㆍ미술ㆍ불상ㆍ복식ㆍ건축 등의 인접학문으로까지 연구 범위가 확대되었다.20)

    아울러 이러한 성과들은 발해사가 한국사에서 어떠한 자리를 차지하여야 하는가 하는 南北國時代論이 더욱더 심층적으로 논의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21) 근년에 들어서 많은 개설서에서 남북국시대란 용어를 채택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발해사의 비중이 점차 높아져 가고 있다. 그렇지만 발해사는 한국사에서 아직도 확고한 자리를 잡지 못한 채로 있다. 이것은 삼국통일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한국사에서 과연 신라와 발해를 동등하게 다룰 수 있겠는가 하는 점들과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도 이 문제들을 둘러싸고 논쟁이 지속적으로 벌어질 것이다.

    북한에서의 발해사 연구22)도 1960년대에 시작되었다. 朴時亨이 1962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발해가 모든 면에서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명제를 제시한 것이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였다.23) 문헌 연구를 통한 그의 주장은 朱榮憲이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함으로써 더욱 강화되었다.24) 이들의 연구는 발해사 연구의 방향성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연구사적으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이 연구를 통해서 발해사를 한국사와 연결시킬 수 있는 기본틀을 마련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70년대 초까지 문헌과 고고의 두 방면에서 연구의 기본틀이 마련됨으로써, 그 후의 연구들은 이들의 주장을 보강하는 차원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이 당시의 연구에는 문헌사에서 丁若鏞과 金毓黻의 업적을 많이 수용하였고, 고고학 자료는 60년대 전반에 중국학자들과 공동으로 만주 지역을 조사한 것이 바탕이 되었다.

    다른 연구와 마찬가지로 북한에서는 1970년대에 침체를 보이다가 80년대 들어서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80년대 후반에 발해사 연구 기구와 인력이 대폭 확충되어 연구 성과도 더욱 늘어났다. 문헌학자로서 張國鍾, 蔡泰亨, 孫永鍾, 김혁철, 玄明浩 등이 있고 고고학자로서 金宗赫, 李俊杰, 金志哲 등이 80년대에 들어서 새로 가세하였다. 이밖에 장상렬은 60년대 이래 발해 건축사 논문을 발표하여 주목된다.

    그러나 80년대에 주체사상이 유일사상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으면서 高句麗의 계승성, 그리고 高麗에의 계승성에만 너무 집착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 방면의 연구는 아주 중요한 것이지만, 여기에만 매달림으로써 논증에 무리를 범하고 있고 발해사의 다른 측면에 대해서도 거의 무시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사료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연구의 실증성에서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후대에 엮어진 『陝溪太氏族譜』의 「渤海國王世畧史」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사료로 이용하고 있고, 심지어는 발해가 고려에 계승되었다는 근거로 삼기도 한다.25) 그리고 『東國輿地勝覽』의 기록을 비판없이 받아들여 '고려 후국'을 설정하고 성천에서 신의주로 도읍을 옮겼다고 주장하는 것도 볼 수 있다.26) 이와 연관되는 것이지만 또 하나의 경향으로서 과거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연구 수준으로 회귀하려 하는 점이 눈에 뜨인다. 檀君陵을 둘러싼 논의에서도 이미 드러났듯이 금세기 들어와서의 과학적인 연구 성과들을 포기하고 전근대 사학의 수준으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근래에 와서 실학자들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고, 심지어는 실학자들의 견해를 비판없이 그대로 수용하여 입론의 근거로 삼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고고학에서는 만주의 자료에 대한 접근이 어려워지면서 1980년대 들어서 함경도 지역에서 발해 유적을 찾는 작업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27) 그 결과 상당수의 유적들을 새로이 확인하였으니, 문헌사보다는 이와 같은 새로운 고고학 자료들이 우리들에게는 더 유용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니, 咸鏡南道 新浦市 梧梅里 절터는 특히 주목되는 유적이다. 그러나 조사보고서가 너무 간략하여 유적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기가 어렵고, 고구려의 계승성을 설명하려는 데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고구려 유적과 구별되는 편년 기준을 명확히 제시하지 않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상으로 근년에까지 한국에서 전개되어 온 발해사 인식과 연구 경향을 살펴보았다. 이제 國外로 눈을 돌려보겠다. 중국에서의 발해사 인식은 『舊唐書』 渤海靺鞨傳과 『新唐書』 渤海傳을 기본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唐會要』, 『冊府元龜』, 『五代會要』, 『資治通鑑』 등은 전자를 따르고 있고, 『玉海』, 『文獻通考』, 『金史』 등은 후자를 따르고 있다. 그런데 두 역사서에서는 발해사의 성격을 명확히 규정하지 못한 채 靺鞨的 요소와 高句麗的 요소가 동시에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그 이후의 문헌들도 이러한 서술을 답습함으로써 새로운 역사 인식이 별로 형성되지 못하였다.

    발해사 연구는 19세기에 曹廷杰, 景方昶 등이 지리고증을 하면서 단초를 열었다. 그러나 전문적인 연구는 금세기 초에 들어와 唐宴, 黃維翰, 金毓黻로부터 비롯되었다. 특히 김육불은 발해에 관한 거의 모든 문헌들을 망라하고 고증도 정밀하게 함으로써, 지금에 이르기까지 중국학자들의 발해사 연구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해방 이후 1970년대 중반까지는 발해사 연구에서 소강기였다. 이 기간에 貞惠公主 무덤, 河南屯 무덤과 같이 중요한 유적이 조사되기는 하였지만, 체계적이지 못하고 우발적인 것이었다.

    문화 혁명이 끝나고 개혁ㆍ개방 정책이 실시되는 1970년대 말부터 모든 학문 분야에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고, 발해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1980년 이후에 발표된 글이 616편이 되어서 전체의 90%를 차지하는 것만 보아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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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발해의 역사에 대해서는 한국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 학계의 주장이 각기 상이합니다. 이러한 문제는 발해사에 대한 기록의 부재에서 비롯됩니다. 즉, 발해인이 직접 쓴 정사(正史)류의 기록이 없는 점이 발해사 연구를 가장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발해에 대한 기록은 중국측 역사서가 활용될 수 밖에 없는데, 발해의 종족 계통을 보여 주는 중국의 기록들이 각각 그 내용상 혼란을 갖고 있습니다. 즉, 발해의 건국자인 대조영의 출신을 언급하면서 발해의 멸망시기와 가장 가까운 시기에 편찬된 ‘구당서’(945)는 발해를 ‘고구려의 별종’으로 서술하고 있는가 하면, 이보다 115년 늦게 나온 ‘신당서’(1060)는 고구려와 다른 듯한 ‘속말말갈인으로 고구려에 부속된 자’로 서술하고 있는 등 기록 간에 혼란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정이 결국 후세인들로 하여금 발해를 고구려인들이 세운 국가로 보기도 하고 또는 고구려인과 계통을 달리 하는 말갈인들이 세운 국가로 보기도 함으로써, 한국사에서 발해의 자국사 논쟁이 벌어지게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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