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선생님의 업적이 궁금합니다.
최근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 당시 입고 있던 혈의의 분석에
대한 뉴스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현재 시대 과학의 발달에 따른 분석이지만,
지금도 김구 선생님의 이야기로 화재가 되는
백범 김구 선생님의 업적이 어떤 것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인식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부터 환국까지 임시정부의 법통을 지킨 그의 행적이 가장 큰 업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헌법 전문에 임시정부 법통에 대한 언급이 있을 정도로 대한민국 역사에서 정통성과 상징성을 가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끈 리더이고 임시정부의 행적이 곧 김구의 독립운동 일대기 이기에 김구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은 확고합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임시정부 청사들에도 김구의 흉상이 세워져 있고 김구의 집무실이 따로 복원되어 있을 정도입니다.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4세 때 심한 천연두를 앓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9세에 한글과한문을 배우기 시작, 아버지의 열성으로 집안에 서당을 세웠습니다.
14세에 통감, 사략과 병서를 즐겨읽었으며 15세에 정문재의 서당에서 본격적인 한학수업에 정진하였고 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나 실패했습니다.
벼슬자리를 사고 파는 부패된 세태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18세에 동학에 입도, 황해도 도유사의 한 사람으로 뽑혀 제 2대 교주 최시형을 만났으며 19세 팔봉접주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공략, 이 사건으로 1895년 신천 안태훈의 집에 은거하며 당시 그의 아들 중근과도 함께 지냈습니다.
또 해서지방의 선비 고능선 문하에서 훈도를 받았고, 항일의식을 참지 못해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김이언의 의병부대에 몸 담았으며 을미사변으로 충격을 받고 귀향을 결심,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에서 쓰치다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21세의 의혈청년으로 국모의 원한을 푸는 첫 거사를 결행했습니다.
그 해 5월 집에서 은신중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 7월 인천 감리영에 이감, 다음해인 1897년 사형 확정, 사형직전에 집행정지령이 내려져 생명을 건질수 있었지만 석방이 되지 않아 이듬해 봄에 탈옥했습니다.
삼남일대를 떠돌다 공주 마곡사에 입산해 승려가 되어 원종이란 법명을 받았고, 1899년 서울 새절을 거쳐 평양 근교 대보산 영천암의 주지가 되었다가 몇 달만에 환속했습니다.
수사망을 피해 다니면서도 황해도 장연에서 봉양학교 설립을 비롯해 교단 일선에서 계몽 , 교화사업을 전개, 20대 후반에 기독교에 입교해 진남포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 총무로 일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상동교회 지사들의 조약반대 전국대회에 참석, 이동녕, 이준, 전덕기 등과 을사조약의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 하고 대한문 앞에서 읍소하면서 종로에서 가두연설을 나섰습니다.
한편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거시도 하여 구국대열에 앞장섰으며 1906년 해서 교육회 총감으로 학교설립 추진, 다음해 안악에 양산학교를 세웠습니다.
1909년 전국 강습소 순회에 나서서 애국심을 고취하는 한편, 재령 보강학교 교장이 되었고 그때 비밀 단체 신민회 회원으로 구국운동에 가담, 그 해 가을 안중근의 거사에 연루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습니다.
1911년 1월 데라우치 총독의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안명근 사건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선고받았으며 1914년 7월 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 이감, 가출 옥여 김홍량의 동산편 농장관리인으로 농촌부흥운동에 주력합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에 취임했습니다.
이듬해 헌법을 제정,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치면서 국무위원이 되었고 1929년 재중국 거류민단 단장을 역임, 1930년 이동녕, 이시영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했습니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의혈청년들로 하여금 직접 왜적 수뇌의 도륙항전에 투신하도록 지도력을 발휘, 이에 중국군 김홍일 및 상해병공창 송식표의 무기공급과 은밀한 거사 준비에 따라 1932년 1.8이봉창의거와 4.29윤봉길 의거를 주도한 바 있는데 윤봉길이 이 의거가 성공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습니다.
1933년 장개석을 만나 한, 중 양국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중국 뤄양군관학교를 광복군 무관양성소로 사용하도록 합의를 본 것은 주목받은 성과였으며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습니다. 1934년 임시정부 국무령에 재임, 1940년 3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에 취임했습니다.
같은해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 총사령관에 지청천, 참모장에 이범석을 임명해 항일무장부대를 편성,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즈음하여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며 임전태세에 돌입했습니다.
1942년 7월 임시정부와 중국정부 간에 광복군 지원에 대한 정식협정이 체결되어 광복군은 중국 각 처에서 연합군과 항일공동작전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그 뒤 개정된 헌법에 따라 1944년 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 부주석에 김규식, 국무위원에 이시영, 박찬익 등이 함께 취임했습니다.
일본군에게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산시성 시안과 안후이성 푸양에 한국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면서 미육군전략처와 제휴하여 비밀특수공작훈련을 실시하는 등 중국 본토와 한반도 수복의 군사훈련을 적극 추진하고 지휘하던 중 시안에서 8.15광복을 맞이합니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함께 제 1진으로 환국, 그해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의 신탁통치결의가 있자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적극 앞장섰으며 오직 자주독립의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정계를 영도해 나갔습니다.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의 부총재에 취임, 1947년 비상국민회의가 국민회의로 개편되자 부주석이 되었으며 그해 6월 30일 일본에서 운구해온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세 의사의 유골을 첫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봉안했습니다.
이를 전후아여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민주의원, 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 김규식과 함께 이끌었으며 1947년 11월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을 지지하면서 그의 논설 나의 소원 에서 밝히기를 완전자주독립노선만이 통일정부 수립을 가능하게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1948년 초 북한이 국제연합의 남북한총선거감시위원단인 국제연합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함으로 선거가능지역인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김구는 남한만의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수립방침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해 2월 10일 3천만동포에게 읍고함 이라는 성명서를 통해 마음속의 38선을 무너뜨리고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강력히 호소, 분단된 상태의 건국보다 통일을 우선시하여 5.10제헌국회의원선거를 거부하기로 방침을 굳히고 그해 4월 19일 남북협상차 평양으로 향했습니다.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 등이 남북협상 4자회담에 임하나 민족통일정부 수립에 실패하고 그 해 5월 5일 서울로 돌아온 후 한국독립당의 정비와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일에 주력하며 구국통일의 역군 양성에 힘썼습니다.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그 해 8월 15일 과 9월 9일 에 서울과 평양에 각각 세워진 뒤에도 민족분단의 비애를 딛고 민족통일운동을 재야에서 전개하던 가운데 이듬해 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의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했습니다.
7월 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고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추서, 4.19혁명 뒤 서울 남산공원에 동상이 세워졌으며 저서로는 백범일지를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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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선생은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나 유학교육을 받는 등 좋은 환경에서 생활하다가 정치에 입문하면서 여러차례 투옥을 당하게 됩니다. 중국 상해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상해부터 중경까지 옮겨다닌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독립운동에 매진하다가 해방이후에는 한국 민주당을 만들어 민주주의와 인권을 외쳐오다가 친공산주의자인 안두희의 총탄에 서거하였습니다.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해 온점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발전과 인권신장을 위해 노력해 온 점에 존경심을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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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반대하고, 대한독립을 추구하는 대표적인 조직이었습니다.
국제 독립운동 지원: 백범 김구는 대한독립만세국민회의의 활동을 통해 국제적인 독립운동 활동을 지원했습니다. 그는 1919년 6월에 파리에서 개최된 제1차 판미회의에 참석하여 조선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또한 1933년에는 일본에서 열린 난베이혁명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을 주도했습니다.
독립군 창설: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백범 김구는 독립군을 조직하였습니다. 1940년 일본 내에서 대한독립군을 조직하고 지휘하면서 일본에 대항했습니다. 그는 지하 독립군 조직을 주도하면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훈련시키고 일본에 대항하는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독립 선언문 작성: 백범 김구중 독립운동의 염원과 목표를 담은 "독립선언문"을 작성했습니다. 이 선언문은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패배한 직후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해 발표되었습니다. 독립선언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창립 이후, 그 동안의 독립운동의 결과물을 정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백범 김구 업적는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로, 그의 업적은 대한민국 독립 운동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의 행동과 업적은 독립을 위한 용기와 희생정신을 상징하는 예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김구 업적 중에서 가장 큰 업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창립입니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김구와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창립했습니다. 이 임시정부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반대하고, 대한독립을 추구하는 대표적인 조직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조선인들의 독립적인 정부 조직으로서 국제사회에 한국 독립의 목소리를 대표하였습니다. 김구는 임시정부의 주석으로서 그 중심 인물이었으며, 일본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지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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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며 민족통합을 통한 완전한 독립국가를 이룩하려고 노력하신 인물입니다. 그는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 임시정부 경무국장 직을 맡았습니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 때 해체 위기에 처한 임시정부를 지켰고, 1930년대 장제스의 지원을 이끌어내면서 임시정부의 실질적 리더로서 활약했으며 1940년대에는 주석이 되어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임시정부의 몸집을 키웠습니다. 우리나라 헌법 제1호와 10호를 보시면 우리나라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헌법 제1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제제도를 수립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케 하며 각인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케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여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결의하고 우리들의 정당 또 자유로히 선거된 대표로써 구성된 국회에서 단기 4281년 7월 12일 이 헌법을 제정한다."
<헌법 제10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이처럼 임시정부의 위기 속에서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외교적 노력을 다하신 위대한 독립운동가입니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고, 지폐 100,000원권 인물로 김구가 선정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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