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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함23.06.01

대한민국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6월 6일 현충일도 다가오고요. 대한민국 여성 독립운동가도 꽤 계셨다고 합니다. 비록 역사에 이름없는 들도 계시지만 숭고한 희생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기록이 남아 있는 윤희순, 박차정, 박자혜, 권기옥, 남자현, 김마리아 등에 대해서 업적 간략히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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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유관순의 삶>

    유관순은 1902년에 충청남도 천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열네 살이 되던 1916년에 선교사 소개로 이화 학당에 들어가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에 1919년 3월 1일에 서울 도심에서 많은 사람들이 만세 시위를 벌이는 3 · 1 운동이 일어납니다. 유관순도 이화 학당의 학생들과 함께 만세 시위에 참여하는데, 이 시위가 계속되고 확산되면서 조선총독부는 3월 10일에 중등 이상의 학교에 임시 휴교령을 내립니다.

    학교가 문을 닫자 유관순은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갔고, 마을의 지도자인 조인원 등과 아우내 장날에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합니다. 4월 1일에 이르러 그녀는 아우내 장터에서 “나라를 되찾아 독립을 이루자.”는 내용의 연설을 하고 나서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위에 나서자, 일본의 헌병과 경찰들은 총검을 휘두르며 시위 군중을 탄압합니다. 이 과정에서 유관순의 부모는 헌병의 총칼에 찔려 죽임을 당했고, 그녀도 주동자로 붙잡혀서 고문을 받게 됩니다.

    유관순은 재판을 받는 동안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만세 시위의 정당함을 주장해 징역 3년형을 판결 받습니다. 그녀는 형무소 안에서도 만세 시위를 멈추지 않았고, 그때마다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으며 결국 열여덟 살에 감옥 안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유관순의 명언>

    ◎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을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 나는 당당한 대한의 국민이다. 대한 사람인 내가 너희들의 재판을 받을 필요도 없고, 너희가 나를 처벌한 권리도 없다.

    ◎ 나는 대한 사람이다. 나라를 위해 독립 만세를 부르는 것도 죄가 되느냐!

    ◎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 우리나라 문제는 우리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윤희순 선생은 초기 을미의병부터 후기 정미의병때까지 직간접적으로 의병운동에 참여, 8편의 의병가를 만들어 여성과 청년들에게 나라사랑 정신을 일깨워주었으며 4편의 경고문을 지어 의병과 싸우던 관군, 의병을 밀고했던 밀고자들, 일본군에 경고했습니다.

    박차정은 조선청년동맹과 항일여성운동 단체인 근우회 동래지부 회원, 신간회 동래지회 회원으로 활약,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 반일학생운동으로 확대되도록 기여, 남경조선부인회를 조직, 부녀자들의 민족의식 고취와 대동단결을 주도했습니다.

    권기옥은 학생시절 비밀결사대 송죽회 가입 , 독립운동 기금을 모으로 평양에서 만세시위운동 참가, 임시정부의 추천을 받아 중국 항공학교 1기생으로 입학해 한국 최초 여성비행가로 활동했으며 결혼 후 독립을 위한 여러 활동에 가담했습니다.

    남자현은 서로군정서 등에서 활약했으며 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암살을 계획, 혈서 조선독립원 작성으로 조국 독립을 호소했습니다.

    김마리아는 고려혁명군으로 활동, 중국 중앙군관학교 서북북교의 러시아어 교관을 역임, 1922년 고려혁명군 정치부원으로 입단해 피복창 주임이되었고 1931년 만주사변 발발 이후 이범석이 마점산 부대와 함께 중국군으로서 항일전에 참여할 때 마점산 장군의 통역관을 지냈고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이 창설 된 후 중국 중앙군관학교 서북분교에서 러시아어 교관을 역임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윤희순, 박차정, 박자혜, 권기옥, 남자현, 김마리아는 대한민국 독립운동가로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인데요. 이들은 1919년 3.1 운동을 비롯한 일제강점기에 활동하였으며, 특히 청년단장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윤희순은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감옥에서 고문을 받았으며, 1947년에 서울에서 별세하였습니다. 박차정과 박자혜 역시 일제강점기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감옥 생활과 고문을 겪은 후, 각각 1946년과 1946년에 서울에서 별세하였습니다. 권기옥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하였으며, 1978년에 서울에서 별세하였습니다. 남자현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하였으며, 1986년에 서울에서 별세하였습니다.

    이들은 국가 독립을 위한 투쟁을 하면서 많은 어려움과 위험을 감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희생과 투지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의 역사에 큰 흔적을 남겼으며, 현대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또한, 김마리아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기간 중에 활동한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을 알리기 위해 그들의 초상화를 그려 인물화 작업을 했습니다. 그녀의 작업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을 기리고, 그들이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독립운동가들은 대한민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헌신한 영웅들로, 그들의 투쟁과 희생은 여성들과 대한민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권리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매우 훌륭하고 존경스럽다고 생각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마리아 - 신념의 여성

    2.8 독립선언서를 국내에 몰래 반입하고 독립선언의 소식을 전파한당사자이다.


    박차정 - 근우회의 투사, 조선 의용대 전사

    흔히 김원봉의 아내로 알려진 박차정 또한 병보석 중에 감시를 피해 망명을 감행한 투사다.


    권애라 - 꺾이지 않는 여성 투사

    개성 3.1 운동의주도자이다.

    -출처:국립중앙도서관




  • 안녕하세요. 김선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 윤희순 (1889-1964): 대한 청년 단장으로 활동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초대 부총리 박은식 박사의 배우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의 침략에 반대하는 여성의지를 굳건히 다지는데 이바지하였습니다.

    2. 박차정 (1890-1976): 3·1 운동 당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일본 침략에 반대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였으며, 만주와 상해에서 활발한 독립 활동을 했습니다.

    3. 박자혜 (1900-1942): 1919년 3·1 운동 당시 부산에서 활동했으며, 민족 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에게 독립의지를 불어넣었습니다. 그 후 임시정부를 위해 자금을 조달하는 일에 참여하였습니다.

    4. 권기옥 (1901-1977): 조선 최초의 여성 변호사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조선민주당에 참여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서울시의 시의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5. 남자현 (1892-1974): 1919년 3·1 운동 당시 활동했으며, 광주 학생 독립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국가 무형문화재 지정된 남도민요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6. 김마리아 (1896-1971): 불교인이면서 독립운동가로,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하였습니다. 교육과 문화 활동을 통해 독립 운동에 기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