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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굴데굴
데굴데굴23.04.05

정릉에 있는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은 언제 지금 위치로 옮겨진건가요?

역사책을 읽다 보니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이 처음에는 지금 덕수궁 자리에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언제 정릉 지금 위치로 옮겨진건가요?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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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은 원래 오늘날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있었다. 이미 고려시대부터 도성 안에 묘를 쓸 수 없었는데, 태조는 신덕왕후의 존재감과 권위를 유지하고자 경복궁 바로 앞에 정릉을 두고 원찰로 흥천사(興天寺)를 세웠다. 불교가 왕권의 비호를 받은 가장 큰 이유는 왕즉불 사상이므로 권위를 세우는데는 불교가 유교보다 훨씬 유용하니 전부 왕후와 세자의 권위를 유지하겠다는 정치적 포석이었다.[2]

    그러나 태종이 즉위하면서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태종이 신덕왕후 강씨에게 품었던 원한은 어마무시했는지 즉위 후에 본격적인 '신덕왕후 지우기'에 나섰던 것. 우선 신덕왕후의 무덤으로부터 100보 밖에 있던 땅을 하륜 등 공신들에게 나누어줬는데, 그 자리에 공신들의 집들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태조는 말없이 울었다고 한다.


    태종은 신덕왕후를 어떻게든 후궁으로 강등시키고 싶었던 듯 하다. 그녀의 위패를 종묘에서 치워버렸고, 기일이 되어도 조회도 파하지 않고 진행했다. 태조의 체면을 생각해서 제사는 지내주었지만 그마저도 왕후가 아니라 후궁의 예로 지냈다. 태조 사후에는 아예 정릉 자체를 외지로 옮겨버렸는데, 당시 양주목 관할이었던 오늘날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으로 이장시켜 버렸다. 마지막으로 능에 사용되었던 12지상들은 청계천을 치수한 김에 광교(오늘날 청계천 광통교)를 세워서 석재로 사용해 물 속에 거꾸로 처박아버렸다.


    또한 1416년(태종 16년), 신하들에게 신덕왕후가 자신의 어머니인지 물어보면서 태조의 후궁인 성비와 비교하는 등 격하시키려는 시도가 보인다.# 태종과 신하들은 신의왕후가 살아있던 점을 들며 신덕왕후가 계모가 아니라고 하였고 오히려 후궁 성비에 비교하며 후궁에 가깝다는 의견을 결론지어 내었다.

    태종의 아들 세종은 국가에서 주관하던 정릉 제사와 기신재제를 없앴다. 또한 이숙번과 변계량의 신덕왕후 적첩 논쟁을 들어 어떤 것이 맞는지 황희에게 물었는데 황희는 오래 되어 잊어버렸다면서도 “성비에 대한 제사도 3년 지나면 정릉과 같이 해야한다”고 말하면서 후궁 대우에 일조한다.#


    태조 때 현비에 봉해진 이후에는 현비로 불리다가 죽은 이후에는 주로 정릉으로 불렸다. 태종 대에 완성된 <태조실록>에서는 강비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었으나 이후에는 쓰인 경우가 없다.[3] 세종에서 선조 초기까지 보면 대체로 무덤의 이름을 따서 정릉으로 지칭되었다.


    선조 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신덕왕후에 대한 예우를 복권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 근거는 비문에 그녀가 차비(둘째 왕비)로 적혀 있는 등 태조의 왕비임이 명백하다는 것이었다. 태종과 세종은 공식적으로 후궁으로 격하하지 않고 예우를 후궁으로 했었고 기록에서 그녀의 지위 자체는 후궁이 아니라 차비(둘째 왕비)였다.[4]


    태종과 세종 이후 사실상 평민의 무덤으로 전락해 제대로 된 관리를 받지 못한지 172년이 지난 1581년(선조 14년), 선조의 가마 앞에서 강순일이 '자신은 국묘를 돌보고 있으니 군역에서 면제해달라.'고 격쟁했다. 당시 함흥에 있는 조선의 추존 4대조 왕릉을 관리하는 사람을 국묘봉사자라 해 군역을 면제했는데, 즉 강순일의 주장은 신덕왕후의 예우를 왕비격으로 복권해야 한다는 말과 같았다. 하지만 선조는 신의왕후의 직계 후손이라서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많은 신하들이 신덕왕후의 복권을 상소하지만 왕이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다 300여 년 가까이 지난 1669년(현종 10년), 송시열 등 여러 신하들이 신덕왕후 능을 보수하는 문제에 대해 상소했을 때, 현종이 이를 가납[5]함으로써 드디어 신덕왕후의 위패가 다시 종묘에 모셔지고 무덤도 왕릉으로 수복되었다.


    1669년 음력 8월 5일 신덕왕후가 복권되던 날 폭우가 쏟아졌는데, 백성들은 왕비의 원혼이 흘리는 눈물이라 여겼다고 하며 이후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가 순원현경신덕왕후(順元顯敬神德王后)가 되었다.


    대한제국 때는 신덕고황후(神德高皇后)로 추존되었다.


    출처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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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의 첫번째 왕비가 바로 신덕왕후 강씨이다. 고려시대에는 고향에 둔 부인을 향처라 불렀다. 이성계의 향처는 신의왕후 한씨였고 수도 개성에 얻은 부인은 경처라고 했고 신덕왕후 강씨였다


    1408년 태조의 죽음이후 이방원의 복수가 시작된다. 신덕왕후 사후 2년뒤 방원이 주도한 1차 왕자의난(1398.8.26)을 일으켜 세자 방석을 제거한 후 정종(조선 2대왕)의 뒤를 이어 조선 3대왕 태종으로 왕위에 오른 후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을 성북구 정릉으로 옮겨 버린후 신덕왕후 무덤을 훼손하고 후궁으로 격하시켰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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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의정부에서 보고했다. ‘옛 제왕의 능묘가

    모두 도성 밖에 있는데, 지금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이 성안에 있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니, 밖으로 옮기게 하소서.’ (왕이) 그대로 따랐다. 정릉을 도성 밖 사을한(현 정릉동)의 산기슭으로 옮겼다.” (<태종실록> 1409년 2월23일)

    (출처: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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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은 원래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있었는데 이미 고려시대부터 도성 안에 묘를 쓸수 없어 태조는 신덕왕후의 존재감과 권위를 유지하고자 경복궁 바로 앞에 정릉을 두고 원찰로 흥천사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태종이 신덕왕후 강씨에게 품었던 원한으로 즉위 후 신덕왕후 지우기에 나서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위패를 종묘에서 치우고 기일이 되어도 조회도 파하지 않고 진행하며 태조 사후에는 정릉을 외지로 옮기는데 양주목 관할이었던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으로 이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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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보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원래 덕수궁 자리에 신덕왕후가 묻혔지만 1408년에 이방원이 복수를

    하는것으로 해서 무덤을 정릉으로 옮기고 무덤을 훼손하였고 후궁으로도

    격하를 시켰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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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덕왕후 강씨는 조선 제6대 임금인 선조와 함께 묻혀 있는데, 처음에는 덕수궁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1919년, 일제 강점기 때문에 그 무덤을 보호하고 보존하기 위해 정부는 이를 현재의 위치인 서울 성북구 정릉으로 옮기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유는 당시 일제의 식민지 정책으로 인해 조선의 문화유산이 훼손될 우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부는 이에 대한 대책으로 매우 규모가 큰 보호 정책을 시행하였으며, 그 일환으로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도 옮겨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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