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신이라고 불린 치우천황이 정말 동이족인가요?
후한의 유방도 전쟁에 나가기전 제사를 지낼정도로 전쟁에 있어서 신격화된 위치에까지 오른 치우천황이라는 인물이 정말 동이족인지 궁금합니다. 또한 어떠한 생애를 살아갔는지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동이족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중국의 유명한 역사서인『사기』를 당나라의 장수절이 주해한 책에는 '구려의 군주는 치우이다' 라고 되어 있고,
같은 『사기』를 송나라의 배인이라는 인물이 주해한 책에 따르면 '치우는 옛 天子이다'라고 하여 동이족의 제왕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치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말들이
있습니다. 동이족인 묘족의 조상신,
옛 부족인 구려족의 지도자, 배달(신시)국의 14대 왕 등, 확실한 것은 그 말들
모두 우리 한 민족의 조상이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치우는 염제 신농씨의 자손으로
구리로 된 머리, 쇠로 된 이마, 사람의
몸과 소의 발굽을 하고 있고, 네 개의
눈과 여섯 개의 손을 가지고있는
신으로 묘사가 됩니다.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설 속 동방 구려족(九黎族)의 수령으로 ‘양호(兩皞, 태호 복희씨와 소호씨)’ 집단의 중요한 구성원이었다. 그의 활동 중심은 지금의 산둥성 · 허난성 · 허베이성 경계 지대로 알려져 있다. 형제 81명이 모두 짐승의 몸뚱이에 사람 말을 하는데, 머리는 동(銅)이고 얼굴은 쇠였다고 한다. 이런 형상을 하고 어딜 가나 싸움을 일으켰다고 한다.
치우는 성질이 강하고 사나워 용맹하게 싸움을 잘 했다고 하는데, 신화전설 시대의 가장 위대한 제왕이자 중화인의 선조로 꼽히는 황제와 천하를 다툰 동이족의 대표적인 수령이었다. 그가 황제와 벌인 탁록 전투는 신화시대 최대의 전투이자 전쟁으로 꼽힌다.
구려족은 원래 중국 남방에 거주하다 일찌감치 중원 지구로 진입하여 중원 쪽으로 세력을 뻗치고 있던 염제(炎帝, 신농씨족과 부딪쳤다. 쌍방은 오랫동안 싸웠는데, 치우가 구려족을 이끌고 염제족을 물리쳤다. 염제는 북쪽 탁록(지금의 허베이성 쭈오루 남쪽) 일대로 도망쳤다. 그 뒤 염제족은 황제족과 연합하여 구려족에 대항했고, 마침내 탁록에서의 전쟁을 통해 치우를 물리쳤다. 남은 치우족은 염제나 황제 두 부족에 편입되거나 남쪽으로 내려가 묘만(苗蠻)족과 합류하기도 했다.
이 전쟁에서 치우는 짙은 안개를 일으켜 황제 군대가 방향을 잃게 만들어 기선을 제압하기도 했지만, 후에 황제가 지남거를 발명하여 전세를 만회하고 치우를 잡아 죽였다고 한다.
치우는 훗날 전쟁의 신(戰神) 내지 군대의 신으로 받들어졌는데, 그의 강인한 성격과 용맹함 때문이었다
탁록 전투’는 『사기(史記)』의 첫 권인 「오제본기」에 기록된 중국사 최초의 전투라 할 수 있다. 기타 다른 기록들을 참고로 하여 ‘탁록 전투’의 과정을 개괄하면 이렇다.
상고시대 중국 황하 유역과 장강 유역에는 많은 부락과 부락연맹이 거주하고 있었다. 황하 상류와 중류 일대에는 황제 부락이나 염제 부락과 같은 이른바 화하(華夏) 부락연맹이 거주하고 있었고, 황하 하류에는 태호, 소호, 구려(九黎) 등과 같은 부락이 동이(東夷) 연맹을 이루며 거주하고 있었으며, 장강 중류 지역에는 묘만(苗蠻) 연맹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 부락 사이에는 끊임없이 전쟁이 벌어졌는데, 이는 인류 문명이 원시사회에서 점점 계급사회로 진입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 전쟁들 중에서 화하 부락연맹의 수령인 황제와 구려 부락연맹의 수령인 치우 사이에 벌어졌던 ‘탁록 전투’가 후대에 큰 영향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중화민족의 형성단계에 있어서 기본적인 틀을 결정했다.
구려 부락연맹은 원래 장강 유역에 있었으나 점점 황하 하류 일대로 세력을 넓혀갔는데, 구려 부락이 남에서 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염제 부락과 충돌하여 중원에서 끊임없이 전쟁을 치렀다. 황하 유역의 기름진 땅을 빼앗기 위한 전쟁이었지만 결과는 늘 염제의 패배였다. 이로써 염제는 토지를 빼앗지도 못하고 부락 소속의 소수민족마저 치우에게 빼앗겼다. 염제는 치우를 물리칠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강대한 황제 부락에게 도움을 청했다. 황제는 치우의 세력 확장에 진작부터 경계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염제 부락의 요청을 받아들여 공동으로 치우에 대항하기로 했다.
전설에 따르면 치우에게는 81명의 형제가 있었다고 한다. 이 형제들은 맹수의 몸뚱이에 모래와 돌을 먹고 바닷물을 마시며 살았다. 사납고 용맹하기가 이를 데 없었으며, 모두가 각자의 부락을 이끌고 있었다. 이들은 칼과 창, 활과 쇠뇌 등과 같은 병기를 만들어 늘 다른 부락을 침략했다. 몇 번의 전쟁에서 염제를 물리친 뒤 치우는 그 승기를 몰아 형제들과 염제 부락을 추격하여 황제 땅에까지 들어왔다. 황제는 곧 각지의 병사를 거느리고 치우에 맞서 싸웠다. 쌍방은 쭈오루(탁록)에서 맞닥뜨려 대결전을 벌였다.
황제는 평소 곰, 호랑이, 이리 등과 같은 야수를 기르고 있었는데, 전투에서 이들 맹수를 풀어 전투를 돕게 했다. 치우의 병사들이 사납고 용맹하긴 했지만 맹수를 앞세운 황제의 군대를 당하지 못했고 허겁지겁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부대를 이끌고 치우 군대를 뒤쫓았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천지가 암흑으로 변하고 안개가 짙게 끼더니 광풍이 몰아치고 천둥과 번개가 몰려와 한 치 앞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치우가 ‘풍백(風伯)과 우사(雨師)’의 도움을 청해 황제가 치우를 추격하지 못하게 하늘의 기상을 바꾼 것이었다. 황제도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어 법력을 가진 자들을 불러 비바람을 멈추게 했다. 순식간에 비바람이 멎고 날이 개자 황제는 다시 군대를 정돈하여 마침내 치우를 물리쳤다.
치우를 물리친 다음 황제와 화하 부락연맹은 광대한 중원지구를 차지했고, 이 소식을 들은 각지의 부락들이 앞을 다투어 황제에게 귀순했다. 황제는 수많은 부락의 지지를 바탕으로 보다 광범위한 중원지구 부락연맹의 수령이 되었다.
황제와 치우의 전쟁은 중화민족의 형성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중국의 유명한 역사학자인 부사년(傅斯年) 선생은 상고시대 오랜 세월을 거친 중화민족의 형성과정을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로 요약한 바 있다. 말하자면 동방의 이족과 서방의 화하족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융합하면서 오늘날 중화민족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출처 : 중국인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