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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조용한문어8023.06.06

사명대사가 의승군 총대장이 어떻게 된건가요?

사실 전쟁과는 상관이 없는 스님인데 어떻게 해서 총대장의 위치가 된건가요?

스님이기 때문에 무예나 전술에 뛰어남을 확인할 수 없었을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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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06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선조 25년(1592), 49세 나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 순안에 가서 휴정의 휘하에 활약해서 의승도대장이 되었다고합니다. 1593년 3월 선교양종판사에 제수되었고 1593년 8월 경상도 선종 총섭에 임명된 적이 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유정은 32세 나이로 선종의 주지에 추대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에 들어가 서산대사 휴정에게서 가르침 받아 각성했다고 합니다.

    이 일화에 설화적 상상력이 덧붙여져 사명대사가 자기 재주를 과시하다가 서산대사와 도술 대결을 벌인 후 이길 수 없음을 알고는 서산대사의 제자가 되었다는 야사가 나왔습니다.

    출처: 나무위키 유정(조선)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명대사 유정은 출가한지 불과 2년만인 18세에 신유년(1561, 명종 16) 선과에 합격하였다고 합니다. 유정이 갖추었던 이러한 식견과 재능으로 인해 당시의 여러 저명한 유학자 문인들, 예컨대 박순(朴淳), 이산해(李山海), 고경명(高敬命), 최경창(崔慶昌), 허봉(許篈), 임제(林悌), 이달(李達)같은 인물들과 교류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유성룡(柳成龍)의 문집인 『서애집』에서는 유정이 시에 능하고 해서와 초서도 잘 써서 승려들 사이에서 이름이 높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터졌을 때 유정은 금강산에 머물고 있었는데 전세가 급박해 지고 급기야 선조가 궁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 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정은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승군 천 오백 명을 모아 순안 법흥사(法興寺)로 갔습니다. 휴정에게 합세한 오천여 명의 의승군 세력은 그 여세를 몰아 명나라 군대와 함께 왜적에게 함락되었던 평양성을 수복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그는 승려들 사이에 명망이 높았기에 의승군(승려로 모여진 군대) 총대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승려는 살생을 하면 안 되지만 나라의 왕이 서산대사에게 참전을 부탁했고 소산대사제는 각 불교의 승녀에게 같이 동참할 격문을 보냈고 이에 사명대사가 그 뜻에 동참하여 의승군 총 대장이 되었다


  • 사명대사가 의승군 총대장이 된 배경은 당시 조선시대의 고난과 어려움, 그리고 그에 대한 사명대사의 가치관과 철학 때문이었습니다.

    16세기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1592~1598)으로 인해 큰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사명대사는 이런 상황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스스로를 희생하여 나라를 구하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는 스님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스님들을 동원하여 의병을 조직하고 적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사명대사가 이러한 결심을 한 배경에는 그의 종교적 가치관과 철학이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그는 불교의 가르침 중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고통을 겪는다'는 '쿠(Ju, 苦)'라는 가르침을 기본으로, 세상의 고통을 해결하는 것이 스님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관을 바탕으로 스스로를 희생하여 나라를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이것이 그를 의승군 총대장으로 이끈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사명대사의 이러한 활동은 그의 종교적 가치관과 철학, 그리고 그의 패기와 용기를 보여주는 것이며, 이를 통해 그는 우리 역사 속에 중요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