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후기 왕들은 왜 묘호가 없나요??
고려 1대~24대 왕은 묘호가 있는데요.
25대 왕인 충렬왕부터 고려의 마지막 왕인 34대 공양왕까지는 왜 묘호가 없는 건가요?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본래 묘호는 황제국에서만 쓰는 것입니다.
고려의 경우 원나라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면서
관제가 격하를 당했고 묘호도 쓸 수 없게 됩니다.
공민왕 시기에 접어들어 원의 영향력에서
조금씩 벗어나 다시 묘호를 쓸 계기가 형성되었으나
공민왕이 살해되고 뒤를 이은 우왕ᆞ창왕이
왕위에서 쫓겨나 사실상 묘호를 올릴 수 없게 됐죠.
공양왕도 고려의 마지막 왕인데다가
조선시대에 처형되어서 따로 묘호가 없는 것이고요.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후기 왕들이 묘호가 없던 이유는 몽고의 영향 이였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중국의 견제 없이 종호를 묘호로 삼다가 원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멸망할 때까지 왕칭하게 됩니다. 충렬왕부터 원나라의 賜諡(사시)가 단행되고 그 이전의 고종과 원종에게는 사시가 이루어졌는데 그럼으로써 이 사시에다가 왕 자를 붙인 묘호를 고려후기의 왕들은 왕호로 사용하게된 것 입니다. 이것은 고려와 원이 군신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예제원리상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익제 이제현(益齋 李濟賢)이나 한산군 이색(李穡)은 그들의 글에서 충렬왕 이전의 宗號를 칭했던 왕들의 묘호를 모두 王으로 고쳐 썼다고 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왕 가운데 태조부터 원종까지는 묘호와 시호가 모두 있었지만 충렬왕 대부터 시호는 있으나 묘호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원간섭기는 원의 고려 왕실 격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충렬왕 때부터 충정왕까지의 원이 부마국으로 묘호를 올리지 못하고 시호로 격하되었습니다. 즉 제후, 신하로서 황제만 묘호만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민왕도 사후에 원을 대신해서 명이 건국되었으며, 명에 대한 사대의 예로 우왕대 묘호가 아닌 시호만 올려 묘호가 없습니다.
우왕과 창왕은 조선을 건국한 주도자들에 의해 신돈의 자녀로 왕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역사서에도 열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름(휘)인 우와 창에 단순히 왕을 붙여 사용한 정도입니다.
공양왕은 폐위된 왕으로 조선 건국초에 '공양군'이었으나 태종대 추증하여 공양왕의 시호만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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