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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 가운데 태조부터 원종까지는 묘호와 시호가 모두 있었지만 충렬왕 대부터 시호는 있으나 묘호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원간섭기는 원의 고려 왕실 격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충렬왕 때부터 충정왕까지의 원이 부마국으로 묘호를 올리지 못하고 시호로 격하되었습니다. 즉 제후, 신하로서 황제만 묘호만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민왕도 사후에 원을 대신해서 명이 건국되었으며, 명에 대한 사대의 예로 우왕대 묘호가 아닌 시호만 올려 묘호가 없습니다.
우왕과 창왕은 조선을 건국한 주도자들에 의해 신돈의 자녀로 왕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역사서에도 열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름(휘)인 우와 창에 단순히 왕을 붙여 사용한 정도입니다.
공양왕은 폐위된 왕으로 조선 건국초에 '공양군'이었으나 태종대 추증하여 공양왕의 시호만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