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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 며칠 전에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이라는 빈관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선언서를 발표하고 잡혀갈 예정이었으므로, 백업 요원으로 실제 시위를 주도할 15인이 더 있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실제 시위를 이끈 15일 합쳐서 민족대표 48인이라고 불린다. 이중 박희도,최린,최남선이 서너명이 훗날 친일로 변절했지만 나머지 인원은 끝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19년 삼일 운동이후 1920년 2월 임시정부는 성대한 식전 준비를 했으며 3.1일 당일 상하이에서는 오전부터 한인 가옥마다 국기가 나부키기 시작했으며, 정부 차원의 경축식은 이동휘 국무총리와 국무위원, 임시의정원 대의원, 인성학교 학생이 모인 가운데 상해 올림픽 대극장에서 봉행되었다. 여기에는 여운형 교민단장 연설과 이동휘와 안창호의 축사가 있었다. 삼일절 경축 식전은 임시정부와 국내 주요 지역은 물론이고 미국, 러시아, 쿠바 심지어는 일본 등 각국의 도시에서도 치러졌는데 특히 미국 캘리포니아주 300명의 한인이 회집하여 태극기를 단 차량과 간호복을 입은 여성 등이 시가행진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