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영은 정말 우리민족 사람이 맞나요
발해를 건국해 통일신라 시대와 더불어 우리 민족으로 간주되는 발해는 대조영이란 인물이 세웠는데요 사실 정확하게 대조영이 우리 민족이라는 역사적 근거가 존재하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남북국시대 발해의 제1대(재위:698~719) 왕입니다.
그의 생애는 다음과 같습니다.
본명은 대조영(大祚榮)이다. 고구려 유민으로서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의 영주(營州) 지방에 그 일족과 함께 옮겨 와 거주하였다.
『구당서(舊唐書)』에 의하면 696년이진충(李盡忠)·손만영(孫萬榮) 등이 이끄는 거란족의 반란으로 영주 지방이 혼란에 빠지자, 대조영은 말갈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그 지역에 억류되어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각각 이끌고 당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동으로 이동하였다.
이에 당나라는 대조영에게 진국공(震國公)을, 걸사비우에게는 허국공(許國公)을 봉하고 회유해 당나라의 세력 아래 다시 복속시키고자 했으나 그들은 거부하였다. 당나라는 거란군을 격파한 뒤, 성력연간(聖曆年間, 698∼699)에 추격군을 파견하였다. 당나라에 항복한 거란족 출신의 장군 이해고(李楷固)가 이끄는 당나라 군사가 공격해 오자, 걸사비우의 말갈족 집단이 먼저 교전했으나 대패하였다.
그러자 대조영은 휘하의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당나라 군사의 예봉을 피해 동으로 달아나면서, 한편으로 흩어진 걸사비우 예하의 말갈족 등을 규합하였다. 당나라 군사가 계속 추격해 오자, 대조영은 지금의 혼하(渾河)와 휘발하(輝發河)의 분수령인 장령자(長嶺子) 부근에 있는 천문령(天門嶺)에서 그들을 맞아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그 뒤 계속 동부 만주 쪽으로 이동해 지금의 길림성(吉林省) 돈화현(敦化縣)인 동모산(東牟山)에 성을 쌓고 도읍을 정하였다. 698년에 국호를 진(震),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였다.
그러나 『오대회요(五代會要)』에는 손만영의 반란 때 고려 별종인 걸걸중상(乞乞仲象)과 말갈인인 걸사비우가 요동으로 달아나 고구려 고지(故地)를 나누어 다스렸고, 이에 당나라는 걸걸중상에게는 진국공(震國公)을, 걸사비우에게는 허국공(許國公)을 봉하고 회유해 당나라의 세력 아래 다시 복속시키고자 했으나 걸사비우가 이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이에 당이 이해고를 출전시켜 걸사비우를 죽였는데, 이때 걸걸중상은 이미 죽고 그의 아들인 대조영이 걸사비우의 무리까지 병합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이러한 『오대회요』의 기록은 835년 발해에서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장건장(張建章)이 남긴 『발해국기(渤海國記)』에 의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어 9세기의 발해인의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보아 그 가치가 인정되고 있다.
당시 대조영 휘하의 집단은 오랜 억류 생활과 계속된 이동 과정에서 겪은 시련으로, 강력한 결속력과 전투력을 가진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대조영은 무예와 지략이 뛰어나 그 집단을 기반으로 급속히 동부 만주 일대까지 세력을 확대하였다.
당시 그 지역은 별다른 유력한 토착 세력이 없었고, 국제적으로는 일종의 힘의 공백 지대로서 말갈족의 여러 부족들과 고구려 유민들이 각지에 산재해 있었다. 이러한 때 새로운 힘의 구심점으로 대조영 집단이 등장하자,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의 여러 부족들이 귀속해 들어왔다.
건국 후 곧이어 당나라와 대결하고 있던 몽고고원의 돌궐(突厥)과 국교를 맺고 신라와도 통교했으며, 당나라와는 중종 때 정식으로 통교하였다. 당나라는 713년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했는데, 그 때부터 발해라는 국호가 사용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왕 [高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조영이 어디 출신인지, 어떤 가문 출신인지는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흔히 걸걸중상과 부자지간으로 알려져있지만 이것이 사실인지 알수 없고 사서에 대중상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것은 2020년대까지 전혀 없어 대조영의 아버지 시절에 따라 대씨라는 성씨를 썼는지도 불분명합니다.
대조영이 고구려계인가 혹 말갈계인가에 대해서도 알수 없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조영의 출신에 대해서는 그를 ‘고려 별종(高麗別種)’이라고 한 구당서 발해말갈전 기록과, ‘속말말갈족으로서 고구려에 복속했던 자’라고 한 신당서 발해전 등 두 기록이 있습니다. 대조영을 고구려의 후예로 본 경우는 구당서 외에 오대회요에 ‘고구려 종족’이라고 하였으며,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등 한국의 역사서에서는 ‘고구려의 옛 장수’라고 하여 대부분의 사서에서 고구려인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대조영의 출신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전승이 있어 논란이 거듭되어 왔습니다. 게다가 발해의 영토가 현재 중국 영토의 일부로 되어 있어서 중국학자들은 대조영을 말갈족으로 볼 뿐만 아니라, 나아가 발해사를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여 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기록을 세밀하게 분석한 연구 성과에 따르면, 대조영은 고구려 장군 출신의 유민이며 또한 그를 중심으로 하여 고구려의 유민이 발해를 건국한 것이라는 점에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문화적으로도 발해는 고구려의 문화를 계승한 흔적이 많이 보이며, 따라서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국임이 분명합니다.
668년 고구려가 망한 후 고구려 유민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신라로 귀화한 사람, 당나라로 들어간 사람, 만주의 말갈족과 혼재하여 사는 사람 등 다양하였습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대조영도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乞乞仲象, ?~?)과 함께 요서지역의 영주로 이주하였습니다. 당시 영주는 당나라가 북동부의 이민족을 통제⋅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전진기지로 전략적 요충 지역이었습니다. 이곳에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말갈인⋅거란인 등 여러 종족이 모여 생활하였습니다.
696년 거란족 출신 이진충이 요서 지역에서 측천무후가 통치하던 당나라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반란은 1년여 만에 진압되었지만, 당나라는 이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부득이 돌궐족의 힘을 빌리는 등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하였습니다. 이러한 혼란기를 틈타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을 모으고 걸사비우가 이끄는 말갈 세력과 손을 잡으면서 당나라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당나라는 대조영 세력을 공격하였으나, 대조영은 도리어 당나라 장수 이해고가 이끄는 군대를 천문령 전투에서 크게 격파하였습니다. 곧이어 당나라의 세력권에서 벗어나 남만주 지역에 위치한 동모산에 정착하였습니다. 그리고 새로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진국(震國),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였습니다. 발해는 지역적으로 북서쪽의 거란과 돌궐족의 성장으로 요서 지방이 막혀 당나라의 공격을 직접 받지 않고 안정을 꾀할 수 있었습니다. 당나라도 결국 발해를 국가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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