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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angel
Youangel23.09.02

고려의 천추태후가 권력을 잡았던 방법은?

안녕하세요? 고려시대 천추태후가 왕만 아니었지 고려의 모든권력을 잡았다고 알고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랬는지 알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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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드라마 천추태후는 실제 역사와는 많이 다릅니다.

    우선 그 맥락은 같게 가지고 가고 있으나

    드라마 상 천추태후는 김치양과 등을 돌리고 자신의 아들보다는 자기 여동생의 아들을 왕위에 계승하려고 하는데요 이는 아닙니다. 그럼 실 역사에서의 기록으로 남아 있는 천추태후를 살펴 보겠습니다.

    우선 천추태후는 왕건의 마지막 부인의 손녀 입니다.

    천추태후는 자신의 외삼촌과 결혼을 하여 아들을 낳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이 겨우 2살일때 남편이 죽습니다.

    그 남편이 바로 고려 5대 군주인 경종입니다.

    이에 그 뒤의 보위를 천추태후의 오빠가 잇습니다. 바로 성종이지요

    성종은 선대왕의 왕후인 자신의 여동생이 김치양과 내통한 사실을 알고 김치양을 귀양보냅니다. 그렇게 천추태후는 정인과 헤어지게 됩니다.

    성종은 후사를 이을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죽습니다.

    이에 천추태후는 왕손이 자신의 아들의 보위에 앉힙니다. 그리고는 어린 아들을 대신해 섭정에 들어가지요

    이 아들이 아로 7대 군주 목종입니다.

    목종은 기록에 따른면 효자 였다고 합니다.

    천추태후가 섭정을 이유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면 김치양과 내통을 하는것도 모두 모른척하며 어머니가 원하는대로 두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김치양은 드라마속 마의태자의 손자로 나오는데요. 이건 아닙니다. 실제 역사의 김치양은 옛 신라 땅에 살았던 몰락한 귀족입니다.

    천추태후와 손을 잡고 고려의 막강한 권세가가 됩니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권력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으며 궐안에는 모두 김치양의 사람이였다고 합니다.

    인사담당의 책임을 김치양에게 천추태후가 주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깐 천추태후는 천추태후 스스로 자신을 부른이름입니다. 궐안에 천추태후가 머물렀던 곳을 스스로 천추전이라 명하고 스스로를 천추태후라고 했습니다. 사후에 헌정왕후라고 칭해집니다.

    여튼 그 권력과 권세로 막강한 힘을 발휘하던 권세가가 되었고,

    천추태후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의 아들을 목종 다음의 보위로 올리려고 합닏.

    목종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더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였겠지요

    목종은 드라마상처럼 남색가였다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천추태후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보위에 올리려고 하려니 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과 같이 경종의 부인이였던 자신의 여동생의 아들 대량원군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에 태후는 대량원군을 강제로 머리를 밀어 절에 보내 스님이 되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권세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못했습니다.

    드라마상 태후와 같은 길을 걷는 강조 말입니다.

    역사상에서는 태후와 김치양을 끌어내리고 대량원군을 보위에 올리는데 한 몫하는 인물입니다.

    강조와 그의 아버지 또한 거기에 합류합니다.

    이렇게 김치양과 태후의 권세는 그들의 권력에 피해와 악을 본 사람들에 의해 끝을 맺습니다.

    목종, 태후, 김치양, 그리고 김치양과 태후 사이의 아들 모두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대량원군이 왕위를 잇습니다.

    그가 바로 고려 8대 군주 성군으로 기록됙어 있는 현종입니다.

    출처: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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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9.02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태조(太祖, 재위 918∼943) 왕건(王建)의 일곱째 아들인 왕욱[王旭, ? ~ 969, 성종이 즉위한 뒤에 대종(戴宗)으로 추존]의 딸이며, 고려의 제6대 왕인 성종(成宗, 재위 981~997)의 친누이이다. 아버지인 왕욱과 어머니 선의태후(宣義太后) 유씨(柳氏)가 모두 일찍 죽어, 할머니인 신정왕후(神靜王后) 황보씨(皇甫氏)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그래서 동생인 헌정왕후(獻貞王后, ?~992)와 함께 황보씨의 성을 사용하였다. 황보씨는 황주(黃州)의 유력 호족(豪族)으로 신정왕후의 딸인 대목왕후(大穆王后) 황보씨도 태조의 넷째 아들인 제4대 광종(光宗, 재위 949~975)의 비(妃)가 되어 제5대 경종(景宗, 재위 975∼981)을 낳아 외척(外戚)으로 대를 이어 권세를 누렸다. 그리고 광종이 호족의 군사적·재정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왕권 강화를 도모하기 위해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 등 중앙집권적 개혁 정책을 추진하자, 대목왕후를 앞세워 이에 반대하기도 했다.

    헌애왕후는 동생인 헌정왕후와 함께 사촌인 경종과 혼인하였는데, 경종이 즉위한 뒤인 980년 아들인 송(誦, 訟이라고도 함)을 낳았다. 하지만 981년 경종이 즉위 6년만에 죽자, 겨우 2살밖에 되지 않은 송을 대신해 헌애왕후의 친오빠인 왕치(王治)가 광종의 사위로서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그가 고려의 6대 왕인 성종(成宗, 재위 981~997)이다. 성종은 광종(光宗)을 계승하여 중앙 관제를 정비하고, 과거제도를 강화하고 지방 호족을 향리(鄕吏)로 편입해 통제하는 등 중앙집권적 개혁 정치를 전개하였다. 이 무렵 헌애왕후는 외가의 친척인 김치양(金致陽)과 정을 통하였는데, 이 사실이 알려져 분란이 생기자 성종은 김치양에게 장형(杖刑)을 내린 뒤 멀리 유배를 보냈다.

    997년 성종이 죽자, 헌애왕후의 아들인 송이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그가 고려의 7대 왕인 목종(穆宗, 재위 997~1009)이다. 목종이 즉위한 뒤에 헌애왕후는 천추전(千秋殿)에 거처한다고 해서 '천추태후'라고 불렸으며, 섭정을 하며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헌애왕후는 유배되었던 김치양을 불러들여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 우복야(右僕射) 겸 삼사사(三司事) 등의 지위에 앉히며 중용하였다. 그리고 황보씨의 본거지인 서경(西京)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으며, 김치양의 출신지인 서흥(瑞興)에 성수사(星宿寺)를 세우는 등 곳곳에 도관과 사원을 건립하였다.


    1003년(목종 6년), 헌애왕후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에게 목종(穆宗)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시키려 하였다. 그래서 헌정왕후가 태조(太祖)의 아들인 왕욱[王郁, ? ~ 996, 뒤에 안종(安宗)으로 추존]과의 사이에서 낳은 대량원군(大良院君) 순(詢, 991~1031)을 죽이려 하였다. 헌애왕후와 김치양은 대량원군 순을 숭교사(崇敎寺)에 보내 승려로 만들었으며, 1006년(목종 9년)에는 그를 남경(南京)의 신혈사(神穴寺)로 보냈고, 여러 차례 자객을 보내 살해하려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헌애왕후와 김치양에 반대하는 세력은 1009년(목종 12년)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량원군 순을 새로 왕으로 옹립하였다. 1009년 정월 천추전에 불이 났는데, 서북면(西北面) 도순검사(都巡檢使) 강조(康兆, ?~1010)는 김치양이 난을 일으켜 왕위를 빼앗으려 한다며 군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진입하여 김치양과 그 아들 등을 살해하였다. 그리고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량원군 순을 왕으로 추대하였는데, 그가 고려의 제8대 왕인 현종(顯宗, 재위 1009~1031)이다. 헌애왕후는 유배되었다가 뒤에 황주(黃州)로 옮겨가 머물렀다. 그러다 1029년(현종 20년) 왕궁으로 돌아와 숭덕궁(崇德宮)에서 죽었다. 시호는 응천계성정덕왕태후(應天啓聖靜德王太后), 능호는 유릉(幽陵)이라 하였다.


    <고려사(高麗史)> 등의 사서에서는 헌애왕후를 김치양과 사통하여 왕실과 나라를 어지럽힌 음탕한 여인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이는 당대의 관습을 무시하고 조선의 성리학적 사관에 기초해 이루어진 왜곡된 평가라는 비판이 일반적이다. 최근에는 팔관회나 연등회를 폐지하는 등 유학의 정치이념을 강조했던 성종에 맞서 전통사상을 강조하고 서경을 중시하는 등 북진정책을 수호하려 했던 여걸로 재평가하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유학은 사대주의, 전통사상은 자주적 민족주의'라는 지나치게 단순한 이분법적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학계의 비판을 받고 있다.

    출처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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