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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를 설립한 서재필에 대해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민중 계몽에 앞장섰으며 독립협회를 설립한 서재필에 대해 궁금합니다. 근는 어떻게 독립협회를 설립했는지 어떤분이신지 궁금합니다. 서재필에 대해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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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 개화기에 아주 중추적인 역할을 하신분입니다.

    전남 보성에서 출생하여 어머니와 서울로 올라와 공부를 하였고, 김옥균 박영효와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지만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합니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그의 가족들은 역적으로 몰려 부, 모, 형과 아내는 음독자살하고, 동생은 참형을 당했고, 2살 아들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해 굶어서 죽었습니다.

    일본에서 미국으로 들어가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하면서 미국생활에 적응하던중, 독지가를 만나 의학공부를 하여 의사가 됩니다.

    박영효의 권유로 다시 한국에 온 서재필은 중추원 고문을 일을 하다, 1896년 4월 정부의 지원으로 독립신문을 창간하였고, 한편 배재학당에서 목요강좌를 진행하여 계몽활동도 병행하였습니다. 이상재, 윤치호와 독립협회를 결성하였고,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정신을 혁파하기 위해 모화관을 인수·개축하여 독립관으로 바꾸고, 1897년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습니다. 급진 개화파 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 줍니다.

    수구파 정부와 일본측의 추방운동 영향으로 1898년 5월 다시 미국으로 출국하였으며, 당시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하여 육군 군의관으로 참전하기도 하였습니다.

    광복 후, 귀국하여 미군정청고문을 맡았고, 국민들로부터 대통령 추대까지 받았으나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1948년 9월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재필의 본관은 대구이며 호는 송재 입니다.

    아버지는 서광언, 어머니는 성주이씨로 17세기 초 이조참판 이성이 보성에 내려와 터를 잡았으며 1864년 1월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에서 출생, 보성은 그의 외가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5세 경 본가가 있는 충남 논산 은진면에서 성장하다 둘째 아들로서 7촌 당숙 서광하의 집으로 양자 입적되나 서재필의 총명함이 나타나자 안동김씨 출신인 양어머니의 주선으로 7세 경 서울로 올라와 양어머니의 동생인 외숙 판서 김성근 밑에서 성장하며 과거를 준비, 1882년 3월 19세때 알성시에 합격, 교서관의 부정자에 임명됩니다.

    명문가에서 성장해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박영효 등 지도층 자제의 개화파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개화사상을 접했고 1883년 김옥균의 권유로 일본의 도야마 육군유년학교에 입학해 8개월간 현대군사훈련을 받고 이듬해 5월 졸업, 귀국 후 궁궐수비대에 배치되었고 고종을 알연해 사관학교의 설립을 진언, 그 결과 설립 승낙을 받았고 조련국 사관장에 임명됩니다.

    1884년 12월 김옥균이주도하는 갑신정변에 가담해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일을 맡았고 갑신정변 신정부조직에서 병조참판 겸 정령관으로 임명되어 활약하나 정변의 실패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 이들 망명객에서 일본이 냉담하게 대하자 1885년 4월 박영효, 서광범과 미국으로 망명합니다. 국내에서 역적의 가족으로 몰려 부, 모, 형 , 아내는 음독자살, 동생 재창은 참형, 아들은 굶어죽었습니다.

    처음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낮에는 노동하고 밤에는 영어 공부를 하며 적응, 그 후 독지가 홀렌백의 도움으로 펜실베니아주 윌크스베어시에 있는 해리 힐만 아카데미를 졸업, 다시 워싱턴시로 이주해 1889년 컬럼비아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해 낮에는 일하고 야간부에 다닙니다.

    1890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 1893년 6월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 면허를 취득, 이듬해 미국 철도우편사업의 창설자의 딸 뮤리얼 암스트롱과 결혼, 모교에서 강사를 하다 유색인 차별의 분위기로 사직하고 병원을 개원합니다.

    조선에서는 갑신정변의 후유증에서 벗어나 갑오경장으로 개혁이 단행되었고 갑신정변 주도자에 대한 역적 누명도 벗겨졌으며 관직에 진출한 박영효가 1895년 미국에 들러 권유해 그해 12월 귀국, 이듬해 1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됩니다. 귀국 후 미국 시민으로 행동하며 이름도 미국명인 필립 제이손이라 한국명으로 표기한 피재손을 사용했습니다.

    1896년 4월 정부예산을 지원받아 독립신문을 창간, 배재학당에서 목요강좌를 진행해 계몽활동을 병행, 이상재, 윤치호, 이승만 등과 독립협회를 결성하고 이를 중심으로 만민공동회도 개최됩니다.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정신을 혁파하기 위해 모화관을 인수, 개축해 독립관으로 바꾸고 1897년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습니다.

    이러한 활동에 서재필은 외국인 신분이었으므로 앞으로 나서지 않고 뒤에서 지도, 그러나 수구파정부와 러시아 일본측의 추방운동 영향으로 1898년 5월 미국으로 출국, 당시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해 육군 군의관으로 참전했습니다.

    필라델피아에서 인쇄, 문구사업을 하다 3.1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한국 선전활동을 활발히 전개, 잡지와 제휴, 한국문제를 세계 여론에 호소하고 한국에 칙화적인 성향의 미국인을 규합하는 한국친우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후원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승만, 정한경과 함께 제 1차 한인연합회를 개최하였고 한국통신부를 설립해 코리아 리뷰를 발간, 후에 상해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활약, 1922년 워싱턴군축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연명서를 제출하고 1925년 호놀룰루의 범태평양 회의에 한국대표단 일원으로 참석해 일본의 침략을 규탄했으며 한국통신부 활동을 종료하고 국내 신문 및 잡지에 기고활동을 꾸준히 했습니다.

    펜실베니아 의과대학원에서 의학공부를 1년 더 하고 여러 병원에서 의사로 근무, 1936년 개인의원 개업, 1942년~1945년 4월까지 미군 징병검사 의무관으로 자원봉사를 하며 미국회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았습니다.

    광복을 맞은 후 1947년 미군정장관 죤 하지의 초청으로 귀국, 미군정청고문으로 있는 동안 국민의 추앙을 받아 대통령 추대 연명을 받았으나 국내 정치계와의 불화 및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재필(徐載弼, 1864년 1월 7일 ~ 1951년 1월 5일)은 조선의 문신, 대한제국의 정치인·언론인이자,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의사 입니다. 또한 미국에서 병리학자·의사·시인·소설가로 활동하였다. 1977년 11월 30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는데 독립협회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기도 했습니다. 독립 협회는 안경수, 서재필 등이 독립 협회의 햇심 인물인데 이들은 소위 개화파에 속하는 인물들로서 특히 미국이나 러시아에 가까운 입장이어서 정동파 또는 외국인파라고 불리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청국이 종주권을 주장하던 시기에 온건개화파의 반청적인 입장에 있었으며, 따라서 갑오개혁에 참여하였다고 합니다. 그 밖에 이상재, 윤치호, 남궁억 등이 적극 참여하여 협회를 지도하였는데 독립협회 강령은 충군애국(忠君愛國)과 민권쟁취, 자주독립, 국권회복이며, 백성의 인권의 참정권을 주장하던 개화파와 정부의 외세의존정책에 반대하는 지식층의 참여로 이루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