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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3.25

어제 민속촌을 갔는데 서당이 있었어요.

서당은 지금의 학교나 마찬가지로 알고 있는데

그 서당은 아무나 누구나 다닐 수 있는 곳이였나요?

훈장님은 공부하는 아이들의 수업료를 받고 공부를 가르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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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옛날에 서당은 여자는 거의 갈 수 없었으며 양반 자제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해서 양반 자제만 서당에 다닌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조선 전기에는 서당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고 대개 양반들의 자제나 사족들이 다니는 수준이었으며 평민들이나 양반 출신 아이들을 가르치는 서당이 늘게 되었다고합니다. 서당은 남자가 대부분이었고 여자들이 다니는 서당이 없지는 않았지만 공부한다고 해도 여자가 관직에 나갈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기에 기초적 문자만 배웠다고합니다. 민간에서는 남,녀 모두 한자교육을 시킬 필요성을 별로 못 느껴서 그 수는 적었고 대부분은 집 안에서 개인적으로 언문(한글)을 가르쳐 주는 게 일반적이었다고합니다. 그러나 신분제가 사라지고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교육의 필요성이 증가하여 여자아이들도 서당에 가서 한글을 공부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고하네요. 오늘날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글을 읽고 쓸 줄 아는 할머니들 상당수가 소학교가 아닌 동네 서당에서 글을 배웠다고합니다. 하지만 평민하대 성격이 강한 양반만 다닐수 있었고, 여전히 교육의 필요를 모르던 평민출신들은 이 기회를 잡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합니다.

    훈장은 과거 조선시대의 초등교육기관인 서당과 중고등교육기관인 서원의 교사 겸 교장을 뜻합니다.

    훈장도 사람인지라 수강료를 받고 살았는데, 강미(講米)라고 합니다. 주로 쌀이나 땔감, 옷감 등 생필품을 받았는데 이것이 그럭저럭 먹고 살 정도지 지금처럼 교사 노릇해서 돈 벌 정도의 액수는 아니었다고합니다. 일반적으로 서당에 처음 입학하는 날에는 훈장에게 술, 닭, 옷감 등의 예물을 갖추는 것이 하나의 예의였고 훈장과 그 가족의 생활비는 학동의 부모들이 부담하며 춘추로 곡식을 내는 것이 관례였다고합니다. 독신인 훈장에게는 의복, 식사, 세탁도 주선해 주었다고하네요. 그래서 조선시대 서당의 수업료는 강미(講米), 공량(貢糧), 학세(學稅), 학채(學債)등으로 불렀고 보통 서당의 강미는 대개 초학자(신입생)에게는 1년에 벼 반 섬, 그 이상의 학생들에게는 한 섬(10말)을 받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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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도한듀공33
    도도한듀공3323.03.25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옛날 서당은 아무나 다닐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서당은 조선시대에 유행한 문신들의 공부를 지도하고, 교육을 전담하는 곳으로, 고급 지식인들만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즉, 서당은 일종의 고등학교나 대학교와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서당에서는 주로 한문(한국에서 고전문학 등을 쓰기 위해 사용된 중국어)과 유행한 문학작품, 윤리와 도덕, 역사 등을 가르쳤으며, 문과(문학)를 공부하고자 하는 교양 있는 군자나, 향리(향연을 지키는 민간의 지방사대)나 사림(시민) 등도 공부하러 서당에 다녔습니다.


    서당에서는 선생님과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였고, 선생님은 학생들의 학업적 성취와 도덕적 가치를 발전시키기 위해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서당 문화는 조선시대의 지식인 계층을 육성하고, 한국의 문화와 교육체제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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