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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그렇구나생각하면 아하!!
아하그렇구나생각하면 아하!!23.11.14

서희장군이 받아낸 강동6주는 어떻게 받아낸 것 인가요?

서희장군이 외교를 통해서 강동6주를 받아 냈다고 알고 있는데요.

서희장군은 어느 나라에게 어떻게 강동6주를 왜 받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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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1.14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희장군이 강동6주를 얻게 된 배경이 궁금하군요.

    서희는 고려가 송과 친하게 지내고 거란과 교류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반박했습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북쪽 압록강 부근의 지역도 고려 땅인데 지금 여진이 차지해 길을 막고 있지 않소?

    이곳을 지나가기는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라오.

    만약 여진을 쫓아내고 길을 통하게 하면 두 나라가 서로 왕래를 하며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오.

    그러니 당신들은 지금 우리를 공격하는 것보다 여진을 쫓아내는 것이 급선무요.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그곳을 지키며 거란과 친하게 지내겠소.'

    소손녕은 서희의 논리적인 말에 아무런 대꾸를 할 수 없었어요. 서희의 작전이 소손녕에게 제대로 먹혀들었던 셈입니다.

    사실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의 뒤를 이은 나라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수도를 일부러 개경이 아닌 서경(오늘날의 평양)으로 말했답니다.

    소손녕은 대화가 끝난 후 자신의 왕에게 결과를 보고하였고, 요의 왕은 ‘고려와 화해하고 그만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거란으로 가는 길목인 압록강 동쪽 280리 지역을 고려에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여진을 쫓아내는 데에 거란이 적극 협조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강동6주를 획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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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거란 제 1차 침입 때 고려의 장수 서희가 거란장수 소손녕과 벌인 담판을 서희의 외교담판이라 합니다.

    993년 거란이 소손녕을 장수로 삼아 고려에 침입해 왔을 때, 고려조정에서는 중신을 시켜 항복하자는 의견과 서경이 이북의 땅을 베어주고 절령을 경계로 삼자는 견해 등이 나왔고, 이에 성종도 할지론을 따르려 하나 적장의 석연치 않은 행동을 간파한 서희는 저들의 출병이 영토의 확장에 있지 않음을 알고 왕의 동의를 받아 직접 적진에 나아가 소손녕과 담판하게 됩니다.

    이 담판에서 소손녕은 침입의 이유로 고려는 신라땅에서 일어났는데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고구려땅을 침식하고 있으며 자기 나라와 땅을 연접하고 있으면서도 바다 건너 송을 섬기고 있다는 점을 들고 따라서 만약 땅을 베어 바치고 조빙을 닦으면 무사할 것이라 제안합니다.

    이에 서희는 우리나라는 고구려를 옛 터전으로 했으므로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한 것인데, 만일 지계로 논한다면 상국의 동경도 모두 우리 경역 안에 있는 셈인데 어찌 침식했다고 할수 있겠는가. 압록강 안팎도 역시 우리 경내였는데 여진이 그곳에 자리잡고 있어 길이 막히고 어려움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심하다. 조빙을 통하지 못한 것은 여진 때문이다. 만약에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찾아 성보를 쌓고 길이 통하게 된다면 감히 조빙을 닦지 않겠는가. 답합니다.

    서희의 당당하고 조리있는 변론을 들은 소손녕은 군사들을 돌리고 약속대로 고려가 압록강 동쪽 280리의 땅을 개척하는데도 동의해 강동 6주를 개척할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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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와 거란의 전쟁은 네 차례에 걸쳐 일어나게 됩니다. 거란의 제1차 침입 때 고려의 장수 서희가 거란장수 소손녕과 벌인 담판에서 이룬 성과입니다. 993년 거란장수 소손녕은 고려를 침입했습니다. 고려 조정에서는 중신을 시켜 항복하자는 의견과 서경 이북의 땅을 베어주고 절령(자비령)을 경계로 삼자는 견해 등이 나왔습니다. 서희는 거란황제의 사위 소손녕과 마주 앉아 담판을 하게 되는데 소손녕은 너희는 신라의 후손이니 고구려 땅을 되돌려 달라고 요구하였고 서희는 우리는 고구려의 후손이라고 주장합니다. 상황판단이 빨랐던 서희는 거란이 바라는 바는 고려와 송의 단절을 바란다는 점을 알고 고려와 거란이 무역거래를 할 수 없는 이유는 여진이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이에 소손녕이 황제에게 이를 전하자 고려와 화해하고 돌아오라는 명을 받고 고려에 압록강 주변 280리를 고려에 돌려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여진을 몰아내는데 거란이 큰 힘이 된 것입니다. 고려는 여진을 몰아내고 강동 6주에 성을 쌓았습니다. 강동은 강의 동쪽 압록강의 동쪽 6주는 여섯 개의 마을을 의미합니다. 흥화진 용주 철주 통주 곽주 귀주 등입니다. 서희의 외교담판으로 이룬 성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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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993년 거란의 1차 침입 당시 대부분의 고려 조정에서서는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 주고 강화를 맺자는 의견이 다수였으나, 거란의 침략 목적을 파악한 서희가 스스로 강화 회담에 나섰습니다.

    거란의 소손녕은 자신들이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 주장과 고려가 송(宋)과 교류하고 있음을 문제 삼아, 고려가 차지한 옛 고구려 땅을 거란에게 바치고 거란과 국교를 맺으라고 강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서희는 고려야말로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이며, 거란과 교류하려 하여도 압록강 일대의 여진족 때문에 길이 막혀 있다는 점을 들어 이 일대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고려의 국왕이 직접 거란에 가 조회하고 거란의 연호 사용에 합의하자, 거란은 압록강 하류 동쪽 편의 여진족 거주지 280리에 대한 고려의 영유권을 인정하고 회군하였습니다. 이렇게 서희의 담판으로 고려는 여진을 몰아내고 점진적으로 강동 6주를 개척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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