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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발한메추라기알192
활발한메추라기알19223.02.26

인조의 삼전도굴욕이라는 것은 뭔가요?

조선시대의 인조는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으로 올랐던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인조의 삼전도굴욕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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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10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인조의 삼전도 굴욕은 쉽게 말해서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항거하다 도저히 안되어 항복합니다.

    1637년 1월 30 일 삼전도로 나아가서 청태종에게 삼궤구 고두레 세번무릅 꿇고 아홉번절하는 예,

    결국 왕자들과 많은 신하들이 인질로 붙잡혀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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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삼전도 굴욕이란

    굴욕은 "남에게 억눌리어 업신여김을 받음"이란 뜻이구요.

    치욕은 "남에게 당하는 수치와 모욕을 아우르는 뜻"입니다.

    삼전도의 굴욕과 을사조약의 치욕은 결과적으로 단어의 선택만이 다를 뿐

    내용은 별반 다를것이 없습니다.

    그만큼 나라의 흥망성쇠를 좌지우지한 사건이기에 우리가 안타까워 하고

    다시는 반복하지 말아야 할것으로 생각됩니다.

    인조에 대한 삼전도비의 굴욕은 저의 생각엔

    미래를 보지 못하고 현실의 상황을 망각한 외교적.정치적 실수로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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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637년 인조 15년에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했을 때, 인조는 강화도로 갈려고 했으나 길이 막혀 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피하게 됩니다. 결국 오래 견디지 못하고 청나라에 항복하고 굴욕적인 강화를 맺게 됩니다.

    인조가 3번절하고 9번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을 했던곳이 삼전도 입니다. 그래서 삼전도 굴욕이라는 말이 나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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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우선 삼전도의 굴욕의 사전적의미는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항전을 계속하지만 결국 청나라에 항복하게 된다. 이에 인조는 1637년 1월 30일 삼전도로 나아가 청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하게 된다. 그 결과 많은 신하들과 왕자들이 인질로 붙잡혀 가게 되었고, 대청 황제의 공덕을 기리는 삼전도비(대청황제공덕비)를 세우게 된다. 라는것인데 참고 부탁드립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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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전도의 굴욕은 청나라의 병자호란과 관련있는 역사적 사실로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선언을 말합니다.

    https://mediahub.seoul.go.kr/archives/2003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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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삼전도는 인조가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하면서 굴욕적인 패배를 인정했던 장소였다. 그리고 청나라의 강요로 병자호란의 패배를 인정하고 청나라 황제의 공덕을 ..기리고 조공을 바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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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인조는 조선시대 최악의 임금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당시 청나라와의 정치/군사적 다툼에서 밀리고 남한산성으로 도망쳤다가 잡혀서 끌려나온 곳이 삼전도 입니다.

    삼전도는 지금의 잠실 혹은 위례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곳에서 청나라 왕에게 머리에 피가 날 때 까지 머리를 숙여 바닥에 절을 했다는 역사적 기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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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태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인조의 삼전도굴욕은 조선 시대 중기인 17세기 중반에 일어난 사건으로, 김정호(김만중)를 중심으로 일어난 도굴 사건입니다. 김정호는 삼천포 김씨 일가 출신으로, 관직에 임용되어 인조 때에는 영조의 후궁인 인효공주와 친분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김정호는 1663년에 경주 삼천포 신라 제1의 수도인 금성산(현재의 부석사)의 삼전(삼층석탑)을 도굴하여 석조물을 분실시켰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에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고, 국내외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인조는 김정호를 처형하고, 김정호 일가의 재산을 모조리 몰수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국내 문화재의 보호를 위한 조치들이 시행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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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637년 2월 24일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일으키고 한양으로 빠르게 남하하자 조선의 왕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 하지만 청군이 길을 막아 강화도로 갈수 없게 되었고 이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하지만 성내의 물자가 떨어지자 끝내 청나라와 치욕스러운 강화를 맺으니 이를 삼전도의 굴욕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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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인조의 삼전도굴욕은 17세기 중기 조선 시대에 일어난 사건으로, 경복궁 내에 있는 세종대왕과 태조 이성계, 태종, 세종왕후의 묘역인 삼전도(三田道)가 명나라의 침략을 받았을 때 그 유물들이 빼앗겨 나라 바깥으로 나가게 된 사건을 말합니다.

    삼전도는 세종대왕의 조상인 태조 이성계부터 세종왕후까지의 묘역이며, 그 속에는 중요한 문화재와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1627년 명나라의 침략으로 경복궁이 무너지면서 삼전도 내의 유물들도 약탈당했습니다. 이후, 명나라의 왕족들이 삼전도 내의 유물들을 몰래 가져가면서, 수많은 문화재와 유물들이 나라 바깥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인조의 삼전도굴욕은 우리나라의 문화재와 유물들이 타국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지 못한 조선 시대의 약점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그 중요성 때문에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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