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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탈한하늘소43
소탈한하늘소4323.04.09

조선시대에는 속옷을 어떻게 입었었나요?

조선시대에는 아무래도 면소재가 귀했을것 같은데요, 그러면 조선시대에도 면직물로 만들어진 속옷을 입었었나요? 양반말고, 일반백성들에게도 면직물의 속옷이 보급되었었는지 궁금합니다, 혹시 면직물 속옷이 일반백성들에게 보급이 안되었다면, 일반백성기준으로 속옷은 어떤재질의 속옷을 입었었는지도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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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09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의 속옷은 아주 다양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속옷이 아주 다양해졌는데, 남자용으로는 상의인 속저고리 또는 속적삼, 하의인 잠방이가 있었다. 여자의 경우는 맵시를 내기 위한 맵시용뿐 아니라 내외용·땀받이용 등으로, 다른 민족복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여자용 속옷은 다음과 같다.

    ① 속점삼: 홑으로 된 속저고리로, 삼복더위라 할지라도 적삼 하나만 입는 법은 없었고 반드시 속점삼을 받쳐 입었다. 또 삼작(三作)저고리라 하여 겉저고리·안저고리·속저고리를 겹쳐 입었는데 안저고리도 속옷이었다. 이와 같이 저고리 3작으로써 맵시도 냈지만, 속적삼은 주로 땀받이용이었다.

    ② 가리개용 허리띠: 조선 후기에 저고리 길이가 짧아지자, 저고리와 치마 사이의 겨드랑이를 가리기 위하여 생겨났다. 옷을 입기 전에 맨살의 겨드랑이 밑으로 바짝 치켜서 가슴을 납작하게 졸라 매었다. 겹·누비 혹은 솜을 두어 추위를 막기도 하였다.

    ③ 다리속곳: 가장 안에 입는 속옷으로 일본의 훈도시가 이에 속하며, 고구려 고분벽화 쌍영총 씨름도에 장사 두명이 입은 팬티와 모양이 같다. 옷감을 홑으로 길게 하여 허리말기를 달아서 만들었으며 이는 속속곳이 크기 때문에 자주 빨아 입을 수 없는 불편함을 덜기 위하여 생긴 것이다.

    ④ 속속곳: 단속곳과 형태는 같으나 치수가 약간 작으며 밑은 막혀 있다. 한쪽 가랑이가 35cm 전후 나비의 옷감 3∼4폭을 이어 만들어 폭이 상당히 넓다. 구성은 양쪽 가랑이, 밑[襠]·허리말기·끈으로 이루어졌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어깨에 걸칠 수 있도록 어깨끈을 단 경우도 있다. 직접 살에 닿는 속옷이므로 무명·옥양목·광목 등 부드러운 옷감을 사용한다.

    ⑤ 속바지(고쟁이): 남자 바지와 비슷한 형태이나 밑이 터져 있고 가랑이의 통이 넓으며 허리끈이 달려 있다. 삼국시대부터 겉옷과 속옷으로 두루 착용되던 바지가 조선시대에 오면서 여자들의 속바지로 정착된 것이다.

    고려의 저상, 조선 초의 말군과 비슷하다. 속속곳 위에 입으며, 겹바지와 솜바지는 봄가을·겨울용으로 입었고, 여름에는 고쟁이라 하여 홑으로 하였다. 뒤가 터져 있어 용변에 불편이 없도록 하였으며 바짓 가랑이를 무릎 정도까지는 좋은 옷감으로 덧대어 만들기도 하였다. 입을 때는 트임을 오른쪽으로 오게 하고 앞끈은 뒤로 돌려 앞으로 오게 하고 뒷끈은 앞으로 가져다 서로 잡아맨다.

    ⑥ 단속곳[單襯依]: 속속곳과 형태는 같으나 치마보다 다소 짧고 양 가랑이가 넓어 속치마 대용으로 입는다. 앞 뒤 중앙에서 안쪽으로 주름을 4∼5개씩 잡아서 만들고 허리를 단다. 오른쪽에 트임을 주고 앞끈을 뒤로 돌려 앞으로 오게 하고 뒤끈은 앞으로 가져다 서로 잡아맨다.

    ⑦ 대슘치마: 모시 12폭을 이어 만든 정장용 속치마로, 치마의 아래를 버티기 위하여 단에는 높이 4㎝의 창호지 백비를 모시에 싸서 붙였다.

    ⑧ 무지기: 12폭의 모시를 3층·5층·7층으로 길이를 다르게 하여 한 허리에 달아서 겉치마의 허리부분을 부하게 버티어 준 정장용 속치마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속옷 [underwear]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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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고쟁이



    치마 안에 입던 바지 모양의 속옷으로 단속곳 밑, 속속곳 위에 입었는데, 남자의 바지와는 형태가 다르며, 밑이 터져 있고 허리끈이 달려 있어 용변에 편리하였다.



    속속곳



    바지 밑에 입는 것으로 단속곳과 형태가 같은데, 다만 치수가 단속곳보다 약간씩 작고 바대와 밑길이가 길다. 이것은 살에 닿는 속옷이기 때문에 단속곳과는 감을 달리하였다. 보통 옥양목 ·무명 ·광목 등이고, 조금 고급으로는 명주 정도의 부드러운 감을 사용하였으며, 여름철에는 특히 베 ·굵은 모시 ·광당포 ·안동포 등을 사용하였다.



    다리속곳



    가장 밑에 입는 속옷으로, 속속곳이 없어지면서부터 다리속곳을 흔히 입어 바지가 더러워지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형태는 홑겹으로 된 긴 감을 허리띠에 달아 찼다.



    너른바지



    상류사회에서 정장을 할 때 밑받침 옷으로 단속곳 위에 입어 하체를 풍성하게 보이게 한 속옷으로, 특수층에서만 입었다.



    허리띠



    살을 타인에게 보여서는 안 되는 당시의 습관에서 여자의 저고리 길이가 짧아지자 저고리와 치마 사이의 겨드랑이 밑 살을 가리기 위해 가슴을 두른 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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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속옷이 아주 다양해졌는데 남자용으로는 상의인 속저고리, 속적삼, 하의인 잠방이가 있었고

    여자의 경우 맵시용, 내외용, 땀받이 용으로 속점삼, 가리개용 허리띠, 다리속곳, 속속곳, 속바지, 단속곳, 대슘치마, 무지기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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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정욱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여성들이 겉옷 위에 입는 속옷으로 "정의(床衣)"와 "소매(袖買)"가 있었습니다.

    정의는 여성들이 입은 속옷으로, 거의 바지 모양이었습니다. 대개는 긴 기장의 깔끔한 하얀색 스커트였고, 밑단에는 묶을 수 있는 끈이 달려 있었습니다. 이 스커트는 자연스럽게 허리에 맞게 끈으로 묶어 입었으며, 겉옷의 끈으로 더욱 잘 고정되었습니다. 정의를 입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는 흔치 않은 경우였습니다.

    소매는 팔을 감싸는 속옷으로, 원통 모양이었습니다. 소매는 대개 자연색의 백색 소재로 만들어졌으며, 비단이나 찍은것 등이 사용되었습니다. 겉옷의 소매보다 짧았으며, 소매 아래에 있는 군계(袞系)라는 대나무나 종이로 만든 목걸이를 연결하여 소매를 고정시켰습니다.

    남성들은 여성들과 달리 바지 모양의 속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속옷으로는 아랫옷(下衣)과 속치마(褌)가 사용되었습니다. 아랫옷은 여성의 정의와 비슷한 형태로, 허리에서 묶는 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속치마는 다리를 감싸는 속옷으로, 두꺼운 면직물로 만들어졌습니다. 남성들은 속치마를 입고, 외출할 때는 외투나 갓을 씌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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