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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한키위191
넉넉한키위19124.04.06

십자군전쟁으로 인하여 유럽지역에는 어떤 대규모 전염병으로 고생하나요?

십자군전쟁으로 인하여 단순히 전쟁사가 문제가 아닌 전염병으로 유럽지역게 큰 피해를 주었다고 하던데요

그 당시에 어떤 대규모 전염병으로 고생하고 피해규모는 얼마나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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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1세기 십자군전쟁 중에 중동에서 처음 발병한 나병균은 유럽으로 옮겨진 이후 2백 년간 인류를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또한, 1350년 무렵에는 페스트, 즉 흑사병이 유럽을 강타하여 인구의 3분의 1 정도가 목숨을 잃을 정도로 피해가 심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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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쟁 초기인 1096년에는 프랑스 군대에서 발진티푸스로 의심되는 전염병이 유행하여 많은 병사들이 사망하였고 이후에도 장티푸스, 말라리아 등의 전염병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여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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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097년, 1차 십자군이 지나가던 안티오크(Antioch)는 전쟁을 치르기에 훌륭한 요새였다. 하지만 십자군은 굶주림에 지친 상태로 식량을 찾아 수십 킬로미터를 헤매 다녀야 했다. 그해 겨울은 춥고 바람이 많이 불고 습도가 높아서 병사들의 사기를 꺾기에 충분했다. 한편 십자군이 설쳐대는 꼴을 볼 수 없었던 투르크군은 안티오크 방어에 나섰고 프랑스군을 포위해 버렸다.


    여전한 굶주림으로 모든 여건이 열악한 십자군이 거룩한 신앙심으로 마지막 힘을 모아 포위망을 뚫은 것은 1098년 6월의 일이었다. 그 직후부터 장티푸스로 의심되는 전염병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정확한 병명은 알 수 없지만 치명적인 이 전염병은 계층의 고하를 막론하고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몇몇 영주가 세상을 떠나는 걸 목격한 다른 영주들은 자신의 병사들을 이끌고 안티오크를 빠져나갔다. 그러자 전염병도 함께 주변 도시인 마라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를 습격했다. 십자군은 더 이상 안티오크에 머물 수가 없었다. 아무런 작전도 계획도 없이 무작정 추운 겨울에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해야만 했다.


    2차 십자군이 출범한 1148년, 오늘날 겨울이 되면 유럽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 지중해 도시의 하나인 터키 안탈리아(Antalya)에 프랑스 군대가 도착했다. 그런데 장거리 여행을 하는 동안 프랑스군의 전투력은 이미 크게 상실된 상태였다. 터키는 같은 기독교를 받아들인 나라였지만 생존을 위해서는 전투를 피할 수 없었다. 프랑스 군대는 지형에 익숙한 투르크의 기습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데 비잔틴제국과 협상을 마치고 루이 왕이 이끄는 군대와 순례자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려 할 때 남아있던 사람들에게 전염병이 퍼지기 시작했다. 십자군은 각자 능력에 따라 탈출을 감행했다. 그리고 동시에 장티푸스나 세균성 이질로 의심되는 전염병이 도시 전체를 휩쓸었다. 이 전염병은 남아있던 프랑스 군대의 전투력을 거두어갔고, 투르크가 공격을 시작하자 대부분의 프랑스군이 사망했다.


    13세기에 들어서자 유럽에서는 한센병이 대유행을 했지만, 십자군은 비타민C 부족에 따른 괴혈병에 시달려야 했다. 1218년부터 약 1년간 이집트의 다미에타(Damietta)를 점령하는 동안 십자군의 약 5분의 1이 목숨을 잃었다. 기록된 내용을 보면 괴혈병이 확실해 보이지만 이 병은 이슬람군과 다미에타 시민들에게도 만연했다. 따라서 괴혈병과 함께 다른 전염병도 유행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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