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최영 장군은 위대한 장군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막판에 이성계에게 당하기 전까지 그는 무패의 명장이었죠 몽골제국 (원나라)와의 관계가 좋았을 때는 몽골군을 도와 중국 한족 반란군을 대파한적도 있었던 그는 국제적인 명장이었습니다. 최영은 청렴한 정치인으로도 기록되고 있는데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금과옥조처럼 준수한 그였고 명성은 천장을 쳤지만 '통장 잔고'는 항상 바닥이었다고 합니다. '고려사' 최영열전에 따르면 그의 집은 초라했고 간혹 식량도 모자랐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그러나 역사는 오로지 결과로만 말을 하지요. 이렇게 훌륭할 인물이었지만 어쨌든간에 그는 이성계에게 졌습니다.그래서 이후 500년간 이성계 자손들의 무덤이 한양 주변에 화려하게 만들어질 때 최영의 무덤은 경기도 고양시 대사산 중턱을 외로이 지킬 수밖에 없었죠. 최영 못지않게 이성계도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는데 여진족 지역에서 몽골에 충성하여 살다가 1356년에 22세의 나이로 아버지와 함께 고려에 투항한 이래 이성계는 각종 내우우환에서 고려왕조를 구한 1급 충신이었습니다. 위화도 회군이 있기 전까지는 그는 무려 32년간이나 변함없는 충성을 보여 주었죠. 한두 해도 아니고 무려 30년간이나 일편단심을 다한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불법 유턴을 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측하기 힘들었지요.그래서 최영이 이성계에게 오만 대군을 맡겼던 것입니다.굳이 비유하자면 거금 5억 원을 손에 넣은 이성계의 표정이 그렇게 순식간에 바뀌리라고 예측하기 힘들었지요.만약 이성계가 군대를 돌리지 않고 그대로 압록강을 건넜다면 최영은 역사의 패자가 안 될 수도 있었을까?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다고들 합니다 가정을 해 봤자 지난 역사가 되돌려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