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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속의 말똥구리
땅속의 말똥구리23.03.09

조선시대 논개가 역사적인물이 된건 왜인가요?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에도 나오는데요. 논개는 조선시대 기생이였다고 하는데 어떤 역사적 사건으로 역사적 인물이 된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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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3.09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논개는 남편인 최경회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주성 김시민 장군의 휘하로 배속되어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가 함락되고, 남편은 전사를 하였습니다. 성 안의 병사들과 백성들 모두 처참한 최후를 맞을때 남편과 백성들의 원수를 갚겠다는 일념으로 아름답게 치장하고 승리에 도취하여 연회를 베풀고있는 왜장을 유인하기위하여 진주 기생으로 변장을 한 후 참석하여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적장을 해치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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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성은 주씨이고, 본관은 신안(新安:중국)이다. 전북 장수(長水) 임내면 주촌마을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는데 출생일에 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논개에 대한 기록은 조선 광해군 때인 1621년 유몽인(柳夢寅)이 저술한《어우야담(於于野談)》에 전하는데 "진주의 관기이며 왜장을 안고 순국했다"는 간단한 기록만 남아 전한다. 그때문에 논개는 기생이었다고 알려지게 되었다

    구전에 의하면 원래 양반가의 딸이었으나 아버지 주달문이 사망하고 집안에 어려움이 겹쳐 가산을 탕진하자 장수현감이었던 최경회(崔慶會)의 후처가 되었다고 전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5월 4일에 이미 서울을 빼앗기고 전라도 지역에서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자 최경회가 의병장으로 나서 싸우게 되었다. 경상도에서 진주성만이 남아 왜적과 싸우고 있었는데 최경회는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을 지원하여 승리를 거두었다(제1차 진주성 싸움). 1593년 최경회는 경상우병사로 임명되어 싸웠으나 수많은 군관민이 전사 또는 자결하고 28일만에 진주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 최경회는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제2차 진주성 싸움).

    1593년 7월 일본군 왜장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위해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하게 된다. 이 자리에 있던 그녀는 계획대로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가락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벽류(碧流)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南江)에 떨어져 적장과 함께 죽었다.

    출처 : 두산백과 두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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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사람들에게 멸시 받던 기생이 기지를 발휘해서 적장과 함께 자신의 목숨을 던졌다는 것이

    역사에 길이 남아야 하지 않을까요? 역사가 논개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지요.

    진주성이 왜적에게 짓밟힐 때 기녀로서 적장을 유인하여 남강(南江)에 빠져 산화한 사실은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널리 유포되었다. 구전되어오던 논개의 순국 사실이 문헌이나 금석문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1620년경부터라고 추정됩니다.

    사회의 멸시를 받던 기녀의 몸으로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친 충성심에 감동한 유몽인(柳夢寅)이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채록하여 문자화된 것이었다. 한편 진주 사람들이 논개의 애국적 행위를 기리고 전하기 위하여, 순국한 바위에 ‘義巖(의암)’이라는 글자를 새겨넣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논개 [論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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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논개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벌인 일처럼 논개는 자신의 죽음과 왜적도 함께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국가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참다운열사에다 엄청난 의사라고도 볼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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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논개(論蓋)는 조선시대 중기에 활동한 기생으로, 정도전의 첫 아내로 유명합니다. 논개는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반까지 활동하였으며, 1609년 정도전이 사망하기 전까지 그의 가장 신뢰하는 기생이었습니다.

    논개는 자신의 언어 능력과 기품 있는 모습으로 정도전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그 후 정도전이 대신 이 논개를 처형하겠다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논개를 그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논개는 이후 조선시대 상류층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논개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논개를 실제로는 조선시대의 여성 사상가나 문인으로 보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논개를 정도전의 첫 아내로서 그의 정치적 지위를 높인 행위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논개는 정도전의 첫 아내로서 유명해졌지만, 그녀의 정체성과 활동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그러나 논개는 당시의 여성들이 가지지 못했던 교양과 언어 능력, 기품 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조선시대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지에 대한 상상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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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논개는 황진이와 더불어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기생 중 한명으로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최초로 등장하고 조선왕조의 공식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는 논개 관련 기록이 없습니다.

    논개가 기생이었는지, 아니면 애초에 이런 기생이 실존하기는 했는지에 대해서도 역사적인 확인은 되지 않았습니다.

    어우야담에 적장을 안고 뛰어내릴때 손가락이 풀어지지 말라고, 아는 사람들로부터 반지를 빌려 열손가락에 끼운 후 손을 엇갈려 끼우고 뛰어내렸다고하는 내용으로 유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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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왜장 한 명을 죽인 것이 삼장사의 치욕을 씻기에는 부족하다고 하겠으나 성이 함락되려고 할 때 고을에서는 병사를 풀어서 구원해주지 아니하고 조정에서는 공을 시기하여 패하기만 고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견고한 성지를 적군의 손아귀에 떨어뜨려 충신과 지사의 분노와 한탄이 이 일보다 심한 적이 없었는데 보잘것없는 한 기생 여자가 적장을 죽여 보국을 하였으니 어찌 논개가 한국을 빛낸 여성이라고 아니할수가 있겠습니까 논개는 기생이고 경상우병사 최경회 첩이라는 주장은 조선 후기의 기록으로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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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보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라고 해서 높은 벼슬을 얻은 사람만 기록이 되는것이 아닙니다.

    기생이긴 했지만 일본의 큰 장수와 몸을 바쳤기 때문에 위인이라고 하는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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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 분야, 재무설계 분야, 인문&예술(한국사) 분야 전문가, 지식iN '절대신 등급' 테스티아입니다.

    ✅️ 논개는 과거 진주에서 왜장이었던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유인해 진주 남강에 함께 몸을 던짐으로써 국가를 위한 '의로운 일'을 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인물로 평가 받으며, 이러한 행적으로 봤을 때 논개는 마땅히 '논개 의사'이다 이렇게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 - - 추가적으로 궁금하신 점은 의견으로 남겨주시면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성의껏 답변을 드려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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