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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거북이 281
억울한 거북이 28123.03.08

왕의 사위는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요???

안녕하세요

문득 조선시대에 왕의 딸의 남편 즉 왕의 사위는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라는 궁금증이 생겨서 물어봅니다.

사극이나 이런 부분에서도 잘 다루어 지지 않는데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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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6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왕의 사위를 부마라 불렀고, 조선시대에는 의빈이라고 불렀습니다. 사위는 백년손님이란 말도 여기서 유래 되었다 하네요.

    공주의 남편은 종1품 ○○위(尉), 옹주의 남편은 종2품 ○○위(尉), 군주의 남편은 정3품 ○○부위, 현주의 남편은 종3품의 ○○첨위로 봉했다. ○○에는 부마의 본관 내지 그곳에서 따온 칭호가 들어간다네요.

    왕의 사위니 그 대우가 각별하고 편하게 살 수 있지만, 처신을 잘못해서 정치 문제에 휘말려 끔살되거나, 배짱이 두둑해져서 바람을 피다가 장인에게 걸려 혼쭐나는 경우도 있었고, 조선 왕조의 경우 부마는 정책적으로 명예직 외엔 벼슬을 할 수 없어서 가끔 왕명을 받아 공문서를 작성하거나 혹은 의전을 맡거나, 중국에 사신으로 간다든가, 하여튼 실권이 생기진 않는데 얼굴마담으로 누군가 나가야 하는 자리에나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출처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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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저역시 궁금합니다.

    왕의 사위는 벼슬도 하였지만 경국대전반포이후 벼슬을 할수 없었고 글이나 예술분야와 외교사절역활을 하였습니다

    녹봉도 받고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공주의 남편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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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경국대전이 반포되고 제도로 벼슬을 할수 없게 했으나 왕의 사위인 만큼 일정 규모의 녹봉과 주택, 토지 , 노비 등을 하사받아 여유로운 생활을 했고 덕분에 문화예술 활동을 많이 하면서 글씨나 그림, 문장 등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경우가 많았고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명나라와 청나라 등에 갈 때 외교사절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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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공주 혹은 옹주의 남편을 부마 혹은 부마도위라고 했습니다. 이런 부마는 신라에서는 적자가 없거나 순서를 양보하는 경우 부마가 왕위를 잇기도 했다고 합니다. 신라 왕위를 성씨가 다른 박, 석, 김이 번갈아가며 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성이 바뀌는 부분은 대부분 전왕의 사위로서 왕위를 이은 형태입니다. 정말 특이한 경우이며 고려, 조선에는 이러한 경우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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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조선시대에 왕의 딸의 남편인 즉 왕의 사위는 중요한 지위에 있었으며, 궁중에서 귀한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이들은 국왕과의 혈연관계를 맺고 있어 왕실의 권력과 안정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왕의 사위로 선출된 자는 대개 양반 출신으로 출세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들은 궁중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으며, 왕실의 일상적인 일과 행사에서 관여하였습니다. 이러한 역할을 통해 왕실의 힘을 유지하고, 사회의 상위 계층으로 인정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들 역시 사후에는 왕실과의 연관성이 없어지면서 궁중을 떠나 일반 양반 가문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궁중에서의 생활과 일상은 궁중에서 왕과 왕비, 왕의 자녀들과 함께하는 삶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들이 정확히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서,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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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왕의 사위는 일종의 궁중 신하 계층으로서, 혼인을 통해 왕실 가문과 연결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습니다. 조선 왕실은 군주주의 체제였기 때문에, 왕의 사위는 궁중 내에서 권력과 지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왕의 사위는 대개 고부족 가문에서 나온 사람들 중에서 선발되었습니다. 왕이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이 성인이 되어 혼인을 하게 되면, 왕은 자신의 사위 후보들 중에서 상위권에 있는 사람을 선택하여 그와 결혼시키곤 했습니다.

    왕의 사위는 궁중 내에서 상당한 권력과 영향력을 가졌습니다. 대표적으로, 왕의 사위 중에서는 왕위 계승 문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영주파와 출신지파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궁중에서 권력을 행사하면서 왕의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왕의 사위는 정치적으로도 활동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왕이 어떤 문제에 대해 고민하거나 의견을 구할 때, 사위들은 왕과 함께 회의를 하고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왕의 사위는 궁중 생활에 어려움도 많이 겪었습니다. 궁중 내에서는 규율이 엄격하였고, 왕의 사위들도 그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궁중에서의 사는 것은 상당히 귀중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왕의 사위들은 특별한 허가 없이 궁중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또한 왕의 사위들은 자신들의 가문과 왕실 간의 관계 때문에, 매우 높은 기대와 압박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왕의 사위가 자식을 낳지 못하면, 그 사람의 가문은 왕실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지는 것과 같아졌기 때문에, 매우 큰 압박을 받았습니다.

    또한 궁중 내에서의 경쟁과 편견도 있었습니다. 여러 사위 중에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반대로 다른 사위들로부터 제외되거나 비하를 받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시대 왕의 사위는 궁중 내에서 상당한 권력과 영향력을 가졌지만, 그와 동시에 궁중 생활에서의 압박과 경쟁, 편견 등 다양한 어려움과 고민을 겪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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