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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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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부흥운동가 검모잠에 대해 질문드립니다.

고구려 부흥운동가 검모잠에 대해 질문드립니다. 역사책에도 자료가 그리 많지 않고 여기저기 서적을 뒤져봐도 자료들이 아주 많은게 아니더라구요.

검모잠이 벌였던 고구려 부흥운동의 결과는 어떠하였고 검모잠은 어떤 역할을 하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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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구려 멸망 후인 670년 유민 등을 규합해 당나라에 대항해 부흥운동을 전개했으나 부흥운동의 구심점으로 세운 안승(安勝)과의 의견 대립으로 피살되었다.

    활동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구려 수림성(水臨城)출신으로 관등은 대형(大兄)이다. 수림성은 현재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임진성(臨津城)으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검모잠의 활동이 대동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평양 이북의 어느 지점으로 추정하고 있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 뒤인 670년 유민 등을 규합해서 당나라의 관리와 승려 법안(法安) 등을 죽이고 궁모성(窮牟城)에서 패수[浿水 : 대동강] 남쪽으로 옮겨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검모잠의 거병 시기에 대해서는 중국측 기록에는 670년 4월의 일이라고 하고, 『삼국사기』에는 6월의 일이라고 한다. 670년 4월 이전에 거병하고 6월에 남하해 한성을 거점으로 부흥세력을 결집시킨 것으로 보인다. 669년 당나라에서 고구려에 행한 대규모 사민(徙民)과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평양에서 신성으로 옮긴 것과 연결해서 거병시기를 669년으로 보는 설도 다수 존재하고 있다.

    최초 활동 지역인 궁모성은 현재 경기도 연천시 연천읍 공목달현(功木達縣)으로 비정하기도 하나 대동강 북안의 평양 인근 지역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또한 궁모성을 서해의 수군 기지로 보고 고려시대에 궁구문(弓口門)이라 불리던 평안북도 의주로 비정하려는 견해도 있으며, 최근에는 고구려 부흥운동을 요동과 한반도를 연계해 파악하여 개모성(蓋牟城)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새로이 제기되었다.

    검모잠은 한성[漢城 : 지금의 황해도 재령]에 자리를 잡고 서해 사야도(史冶島)에 가 있던 안승(安勝)을 맞아 왕으로 추대하는 한편, 소형(小兄) 다식(多式) 등을 신라로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 문무왕은 사찬(沙飡) 수미산(須彌山)을 보내어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하였다.

    고구려 유민의 계속된 항쟁이 이어지자 670년 4월 당나라에서는 좌감문대장군(左監門大將軍) 고간(高侃)을 동주도행군총관(東州道行軍總管)으로 삼고 우령군위대장군(右領軍衛大將軍) 이근행을 연산도행군총관(燕山道行軍總管)으로 삼아 병사를 보내 진압하게 하였다. 이에 대처하는 방안을 놓고 의견 대립으로 안승에게 피살되었다. 검모잠의 피살 시기에 대해서는 대체로 670년 7월 말로 보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검모잠 [Geom Mo-jam, 劍牟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단정한낙지284
    단정한낙지284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검모잠은 삼국시애에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지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했을 때 유민을 규합하고 당시 당나라의 관리들과 승려들을 척살한 후 남쪽으로 옮겨 자리를 잡아 부흥운동에 나섰습니다. 당시 670년 4월에서 6월쯤의 시기로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지금의 황해도재령이었던 한성에 자리 잡았었고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여 신라 문무왕의 도움으로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하기도 하였는데요. 고구려 항쟁이 이어지자 당나라에서 여러 루트로 진압을 보냈는데 이에 대항하는 방법을 두고 안승과 대척하게 되자 결국 안승에게 피살되고 맙니다.

  •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구려의 부흥운동가. 고구려의 왕족인 안승을 왕으로 추대하고 신라와 연합 작전을 펼쳐 당나라에 맞서서 부흥 운동을 지도하였으나 끝내 실패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검모잠은 고구려의 부흥운동가로 고구려가 망하자 670년 고구려의 유민을 규합하여 궁모성에서 대동강 남쪽으로 진출해 당나라의 관원과 승려 법안을 죽인 뒤 사야도에서 안승 또는 안순을 맞아 왕으로 옹립하고 한성을 근거지로 삼아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신라와 협조해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기에 힘썼으나 당나라가 대장군 고간을 동주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정벌대를 보내자 안승과 갈등을 빚은 끝에 안승에게 피살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검모잠은 고구려의 대형이었다. 고구려 멸망 후 유민을 규합하고 보덕왕을 옹립하여 부흥운동에 나섰다. 신라의 지원을 받아 당의 세력을 몰아내려 했으나, 당군에 역으로 패배하여 부흥세력이 전멸하고 안승에 의해 살해당했다.

    -출처:위키백과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668년(신라 문무왕 8년) 9월, 평양성이 함락되며 고구려는 멸망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도 적지 않은 고구려인은 당나라와 전쟁을 지속하며 저항하였습니다. 이른바 고구려 부흥 운동이 전개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고구려 부흥 운동은 실패하였으나 당나라의 동북아시아 지배 정책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으며, 한편으로 나당 전쟁과 밀접히 연관되어 국제 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 부흥 운동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부흥 운동이 “모두 4년 만에 평정되었다”라고 한 점으로 미뤄 대체로 673년(문무왕 13년) 말부터 674년(문무왕 14년) 초까지가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면 고구려 부흥 운동은 평양성이 함락되고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부터 전개된 것입니다. 평양성을 함락한 당나라는 이곳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동북아시아 전역에 지배권을 행사하고자 했지만 고구려 백성 가운데 당나라에 저항하는 자가 많았습니다. 이에 당나라는 669년(문무왕 9년) 고구려 백성을 당의 황무지로 옮기는 사민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였습니다. 그러나 고구려 백성의 저항은 중단되지 않았고, 오히려 고구려 부흥 운동은 확대되어갔습니다. 검모잠과 안승은 그 대표적인 세력의 하나였습니다.

    검모잠과 안승은 처음 한성, 즉 지금의 황해도 재령 지역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신라의 지원을 받으며 국가 재건을 도모하였습니다. 이를 후대 금마저의 보덕국과 구분해 ‘한성 고구려국’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그 시점은 670년(문무왕 10년) 6월로 나오는데, 이로부터 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평양 지역까지 진출하며 당나라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와 같은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의 대당 전쟁은 신라와 연합한 것으로 나당 전쟁의 일부이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신라본기」에는 이를 신라가 주도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중국 측의 사서에서는 고구려가 주된 적으로 나오고 있어서 부흥 운동의 세력도 만만치 않았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한편 부흥 운동은 검모잠과 안승뿐 아니라 고연무와 같은 고구려의 전직 관료도 참여하였고, 안시성을 비롯한 요동 지역의 곳곳에서 전개되었습니다. 이 중에서 고연무는 안승과 합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과 안시성 지역이 연합하지는 못했습니다. 당나라 군대가 다시 파견되며 압록강 이북으로의 진출이 좌절되었기 때문입니다.

    고구려의 부흥 운동은 안승이 검모잠을 살해하고 신라로 달아나면서 크게 위축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은 황해도⋅경기도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적어도 673년 후반까지 저항을 지속하였습니다. 이 사료에 보이는 발로하는 지금의 임진강 유역으로 당시의 시점이 673년 후반이었던 것입니다. 이후 부흥 운동 세력은 신라로 달아났다고 하였습니다. 신라는 당나라와의 전쟁을 마치고 이들을 안승과 함께 금마저 지역에 이주시켰습니다. 그리고 674년 안승을 보덕국왕으로 책봉하며 고구려의 명맥을 잇도록 한다고 표방하였습니다. 하지만 보덕국은 신라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부흥 운동의 남은 세력이 신라 지역으로 들어오면서 고구려의 재건은 사실상 불가능해지고 말았습니다.

  •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검도장은 고구려의 부흥 운동가 입니다.

    고구려 수인성 출신으로 관등은 대형 입니다. 수림성은 현재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임진성으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검모잠의 활동이 대동강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평양 이북 어느 지점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 뒤인 670년 유민 등을 규합해서 당나라의 관리와 승려 법안 등을 줄이고 궁모성 에서 패수 남쪽으로 옮겨 부흥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검모장의 거병 시기에 대해서는 중국측 기록에는 670년 4월의 일이라고 하고 삼국사기 에는 세월의 일이라고 합니다.

    검모잠운 위에서 언급했듯이 고구려 멸망 후인 670년 등을 규합해 당나라에 대항해 부흥운동을 전개했으나 부흥운동을 구심점으로 세운 안승과의 대립으로 피살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검모잠

    고구려 수림성(水臨城)에서 태어났으며, 《신당서(新唐書)》에는 겸모잠(鉗牟岑)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형 벼슬에 있다가 고구려가 망하자 670년(신라 문무왕 10) 고구려의 유민(流民)을 규합하여 궁모성(窮牟城)에서 대동강 남쪽으로 진출하여 당(唐)나라의 관원과 승려 법안(法安)을 죽인 뒤, 사야도(史冶島;덕적군도 중의 소야도)에서 안승(安勝) 또는 안순(安舜)을 맞아 왕으로 옹립하고, 한성(漢城;재령)을 근거지로 삼아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신라와 협조하여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기에 힘썼으나, 당나라가 대장군 고간(高侃)을 동주도행군총관(東州道行軍總管)으로 삼아 정벌대를 보내자 안승과 갈등을 빚은 끝에 안승에게 피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