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할때 고구려 정신을 계승했다고 하는데 어떠한 근거들이 있나요?
드라마 대조영을 보면 고구려를 이어받아 우리는 새로운 고구려를 세우는 것이다 이런 대사들이 나오더라구요. 그렇다면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할때 고구려 정신을 계승했다고 하는데에는 어떠한 근거들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는 근거는 꽤 있습니다.
먼저 발해의 건국자인 대조영이 바로 고구려의 장군 출신입니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 출신이었기에 고구려 정신을 계승하였고 발해의 주민 구성을 살펴보면 지배층이 고구려인이었고 피지배층이 말갈족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볼때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발해가 외국에 파견한 사신들의 기록을 보면 고씨성을 가진 고구려계 인물들이 많았고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를 보면 발해왕이 스스로를 고려왕이고 칭하기도 하였습니다. 발해의 문화나 건축 양식 역시 고구려와 유사하였습니다. 이 모든 점을 보았을때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는 근거가 충분해 보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발해에 관한 기록은 중국사서의 열전에 적혀 있는 몇 장이 전부이고, 대조영에 관한 기록은 한 줄에 불과합니다. 그나마 적혀 있는 대조영의 출신에 관한 내용도 사서마다 달라서 혼란스럽습니다. 각 사서에 기록된 대조영에 관한 기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경향성을 보입니다.
『구당서(舊唐書)』에서는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원래 고구려의 별종이다”라고 관련사료 하였고, 『신당서(新唐書)』에서도 “발해는 원래 속말말갈로서 고구려에 붙은 자로 성은 대씨이다”라고 관련사료 하였습니다. 『구당서』와 『신당서』에서는 대조영의 출신에 대하여 원래는 속말말갈이고, 고구려의 별종이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말갈적 요소와 고구려적 요소를 동시에 언급하고 있습니다.
반면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한국 측 사서인 『삼국사(三國史)』와 『신라고기(新羅古記)』를 인용하여 고구려의 옛 장군 조영의 성은 대씨(大氏)인데 고구려의 유민을 모아 나라를 세워 발해라고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관련사료 대조영의 종족적 출신에 대해서는 정확히 언급하지 않은 채 고구려의 장군 출신이라고 하고, 발해를 세운 주체가 고구려의 유민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즉 현재 전하지는 않지만 『삼국사』와 『신라고기』는 발해에 대하여 고구려적 요소만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도 대조영을 고구려의 옛 장수라고만 언급하였고, 『고려사(高麗史)』와 관련사료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도 관련사료 발해는 속말말갈인데 “고구려인 대조영(高句麗人 大祚榮)”이 발해를 세웠다고 하여 대조영을 고구려인으로 규정하고 고구려적 요소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엄재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발해 무왕때 일본에 보낸 국서에 「발해국은 고려(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 이래의 오랜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라고 썼습니다
중국의 역사책 중 발해 멸망 후 처음으로 발해역사를 전반적으로 다룬 <구당서> 발해전에도 발해를 옛 고구려 계승자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발해는 피지배층이 말갈족이고, 지배층이 고구려인이었습니다. 지배층이 대 씨나 고 씨였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국의 < 구덩서> 에 기록에 의하면 발해의 관습은 고구려와 거란과 같다고 기록 된것으로 보아 문화와 관습이 고구려와 같음을 알수 있고 발해의 궁터와 성터에서 발견된 기와와 벽돌들이 전부 다 고구려 문양이였다는 점, 그리고 고려 후기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에 대조영을 고구려 장수로 보고 최초로 우리 나라로 인식 하게 되었다는 점으로 발해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발달 했단 것을 알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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