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3차례의 고구려원정에서 모두 패배한 수나라는 많은 병력과 물자를 잃었는데 자치통감에는 수나라의 군대가 처음 요하에 이르렀을 때는 30만 5,000의 병력이었으나 요동성으로 돌아온 자는 오직 2,700명이라 하였다. 30만 2,300명이 원정 한 번에 증발한 것이다. 전투병 30만이 증발하는 것은 지금도 뒷감당이 안 되는 손실인데 전근대에 대규모 원정을 갔다가 얻은 것 하나 없이 저런 참패를 당했으니 수나라의 손실과 피해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결국 수나라는 민심이 바닥을 쳤고 나중에가면 양제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온 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시 수나라의 민심은 연이은 대규모 원정실패와 그에 따른 인명이나 물자손실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매우 높았다. 심지어 양제가 직접 고구려를 공격하는 도중에 군량보급을 담당하던 예부상서 양현감이 대규모로 반란을 일으켰고, 양제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고구려에서 철군할 수밖에 없었던 적도 있다. 거기에는 훗날 당 태종이 되는 이세민도 끼어 있었다. 수문제가 경제력을 키워놨고 수나라의 인구가 5,000만 명을 웃도는 수준이라 이 정도 선에서 그친 것이지, 수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가 이 정도의 피해를 입었으면 반란 정도가 아니라 나라가 그 즉시 망해버린다.
수양제는 강도로 피난을 갔지만 결국 618년, 우문화급의 반란군이 양제를 교살하여 처형했다. 이후 당국공 이연에게 옹립되어 양제의 뒤를 이은 공제가 당고조 이연에게 선양하면서, 남북조를 통일한 첫 왕조로 위세를 떨쳤던 수나라는 건국 이래 고작 40년도 버티지 못하고 허무하게 멸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