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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람한스컹크183
우람한스컹크18323.09.24

만적이 난을 일으키려 시도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비록 노비신분이기는하지만 최충헌의가노였기에 그 위세가 일반인보다는 높았을텐데 만적이 성공가능성도 희박한 난을 일으키려 시도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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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만적은 12세기 후반 고려무신 집권기 최충헌의 가노였으며 개경의 노비들과 함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쥐려 시도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9.24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만적의 난은 1198년 5월에 고려의 수도인 개경(현재의 개성)에서 만적(노비)이 중심이 되어 일으키려다 미수에 그친 노비해방운동입니다.
    1170년(의종 24)에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이 주동하여 일으킨 무신정변으로 고려사회는 크게 변화하였다고 합니다.

    그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무신정변은 문무의 지위를 바꾸었을 뿐 아니라 신분 질서에 많은 변동을 가져왔습니다. 그리하여 하층 계급은 집권 세력이 약화된 것을 이용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현저히 진출하였습니다. 특히 명종·신종 시대에는 각지에서 농민과 노비가 자주 난을 일으켰는데, 그 중 가장 규모가 크고, 목적이 뚜렷한 것이 만적의 난이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198년(고려 신종 1)만적이 중심되어 일으키려다 실패한 노비해방운동입니다. 1170년 무신의 난은 당시 사회혼란과 함께 신분계급에 큰 변동을 일으켜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하였습니다. 과니들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으며 하층민에 대한 과중한 세금과 착취가 심화되었습니다. 결국 상층계급과 하층계급간에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고노비와 농민에 의한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반란이 만적의 난이었습니다. 만적은 당시 무신정권의 최충헌의 사노로 정중부의 난 이래 공경대부가 노비에서 많이 나왔다고 역설하면서 각자 자기주인을 죽이고 난을 일으킬 것을 주도하였습니다. 한충유의 사노 순정의 밀고로 난은 평정되고 만적을 비롯한 수백명의 노비들이 강물에 던저져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계급차별이 심했던 시기에 노비해방을 주장하여 신분제 폐지와 그들의 투쟁의식은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