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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angel
Youangel23.04.16

고려시대 만적의 난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고려시대 때 만적이라는 노비가 난을 일으킨걸로 알고 있는데요 이 시대때 왜 노비가 난을 일으켰는지 역사적 배경과 만적이라는 사람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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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16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신종 1년(1198), 당시 노비 신분의 만적이 중심이 되어 일으키려다가 실패한 노비해방운동입니다. 일반적으로 역사학에서는 한국사 최초의 신분해방운동으로 평가받습니다. 자연재해, 생활고, 탐관오리들의 수취 때문에 일어난 민란은 조선이나 고려는 물론 삼국시대에서도 분명히 존재했지만 주동자가 뚜렷하게 신분 해방을 목표로 삼았던 경우는 만적의 난이 최초입니다.

    만적은 당시 무신정권의 5번째 집권자였던 최충헌의 노비로 추측되는데 몇 명의 노비와 함께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 뒷산에 가서 나무를 하다가 여러 명의 노비들을 모으고 난을 일으킬 논의를 하였다고 한다. 이후 만적은 노비들을 불러놓고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였다고 한다.

    정중부의 난 이래 나라의 공경대부는(公卿大夫) 노예 계급에게서도 많이 나왔다. 왕후장상(王侯將相)에 어찌 원래부터 씨가 있겠는가.때가 오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주인의 매질 밑에서 근골(筋骨, 근육과 뼈, 즉 신체)의 고통만을 당할 수는 없다. 최충헌을 비롯하여 각기 자기 상전을 죽이고 노예의 문적(文籍)을 불질러, 나라로 하여금 노예가 없는 곳으로 만들면 우리도 공경대부 같은 높은 벼슬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연설 당시 자리에 모였던 노비들은 만적의 말에 찬성하였고 다음과 같은 계획을 세운다. 노란 종이 수천 장을 '丁'자 모양으로 오려 표시를 만들어 붙이고 날짜를 정하여 흥국사 뜰에 모여 관노비들의 호응을 받는다. 관노비들은 조정의 청사 내에서 권신들을 죽이고 사노비들은 개경 성내에서 먼저 최충헌을 비롯해 자기 상전을 죽이고 노비 문적(노비 문서)을 불태운 뒤 자기들이 집권하자는 것. 그러나 정작 거사 당일 흥국사에는 몇 백명의 노비들 밖에 오지 않았고 이 정도 병력으로는 거사를 도모할 수 없다고 판단한 만적은 하는 수 없이 날짜를 다시 정하고 이후 보제사에 다시 모이기로 약속한다. 그런데 당시 자리에 있었던 노비 순정이 거사가 실패할 것을 겁내 자기 주인인 한충유를 비롯한 여러 양반들한테 이를 고자질해 버린다. 결국 순정의 밀고로 거사는 알려지고 이를 한충유로부터 전해 들은 최충헌에 의해 거사에 찬동한 노비들은 만적을 포함해 100여 명이 붙잡혀 순정을 제외하고 모두 강에 산 채로 던져지는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이로써 한충유는 승진하고 음모를 밀고한 순정은 은 80냥을 받고 양인으로 면천되었다. 순정에게 상금까지 준 것을 이유로 사실 순정이 프락치였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주장도 있는데 이것 역시 추측의 영역이기는 하다. 결국 만적의 난은 참여자 중 단 1명만이 양인으로 면천된 채 실패로 끝났으나 당시 신분 질서가 엄격했던 시대에 계급을 타파하고 새로운 세상을 일으키려 했던 그들의 생각은 지금에 와서는 높게 평가되고 있다.

    출처: 나무위키 만적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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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170년 고려 중기 일어난 무신의 난은 당시 정치혼란과 함께 신분계급에 큰 변동을 일으켜 하극상의 풍조가 팽배했는데 중앙정부는 정치투쟁과 권력다툼으로 관리기능이 약화되었고,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으며 하층민에 대한 과중한 세금과 착취가 심화되었습니다.

    결국 상층계급과 하층계급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고 농민과 노비에 의한 반란까지 유발시켰는데, 그 중 가장 대규모적이고 목적이 뚜렷한 것이 만적의 난입니다.

    만적은 고려시대 무신정권기의 집권자인 최충헌의 사노비로 주인과 함께 살면서 맡은 일을 수행하는 솔거노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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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무신정변(武臣政變)으로 고려사회는 크게 변화하였다고 합니다. 문신이 중심이 되어 정치를 이끌던 고려사회는 지배층 내부의 갈등이 빚어지는 가운데, 무신에 대한 차별도 지속적으로 일어나면서 무신들의 불만도 높아갔고최충헌이 1197년(명종 27)에 쿠데타를 일으켜 이의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았는데 그 직후인 1198년(신종 원년) 5월에 이 사건은 일어났습니다. 이 운동은 규모가 매우 크고 또 계획적이었다고 합니다무리를 모아 궁궐로 쳐들어가며 최충헌을 우선 죽이고 나서 각 노비의 주인을 죽이고, 그 다음에 노비에 관한 문서를 불태워 없애는 순으로 단계별로 계획을 세우고 수많은 노비들과 약속을 잡았으며, 다른 이들과 구별하기 위해 ‘정(丁)’을 쓴 수천 장의 누런색 종이도 준비했다는 점에서, 이 운동의 계획성도 엿볼 수 있습니다. 결국 실패로 돌아 갔지만 만적의 난은 노비도 얼마던지 출세 할수 있다라고 하는 희망을 갖기에는 충분한 혁명 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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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적 비판 보다 만적의난이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민중의 난으로 자리 매김 하는것은


    노비신분으로부터의 해방에 있었다는 것이 그들의 1차 목표였습니다


    .


    당시 고려사회는 노비문제가 사회적 중요 문제였지만 단순히 향소 부곡이란 특수구역에 거주를제한 하고 행동에 제약을 주게되자



    천인 신분으로 일제히 일어나 주인을 죽이고 천적을 불태워 고려에서 천인의 존재를 없앰으로써 그 같은 신분에서 해방이 되고자 기도했던 것입니다 .


    그런데 만적 등의 항거운동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정권의 탈취까지도 획책했다는 점에서 보다 큰 특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즉 무신정변의주동자인 이의민이 노비 출신였다는점에 이들에게 가능성을 밝혀준것입니다


    신분의 해방과 정권탈취를 기도한 노예 중심의 봉기라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운동이었습니다.


    당시 사회 제도


    고려사회는 엄격한 신분질서가 강조되는 가운데, 특히 노비의 경우는 그 사회적 처지가 가장 열악하였다.


    천민들의 집단 거주지인 향 소 부곡에 집단적으로 거주케 하여 이들의 반란이나 항거를 제도적으로 차단시켜둔 상태였습니다 억제는 반발을 가져온다는 논리처럼 이들에게 엄격한 통제가 오히려 고려사회제도를 붕괴시킨것입니다



    결과


    신분해방을 목표로 일어난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습니다.이러한 천민반란은 무신정권의 강경진압에 의해 실패하였지만, 고려 전기의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벗어나는 원동력을 제공함으로써 이후 고려사회의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다고 평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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