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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그렇구나생각하면 아하!!
아하그렇구나생각하면 아하!!23.01.30

사수대첩은 어떠한 전쟁 이였나요?

살수대첩은 알고 있는데 사수대첩은 처음 들어 봐서요.

제가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사수대첩이 있다고 하네요.

사수대첩은 어떠한 전쟁이였는지 궁금합니다.

어떠한나라가 싸우고 어떠한 이유에서 벌어진 전쟁이였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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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사수 전투는 제2차 고당전쟁 중이던

    고구려 보장왕 21년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당의 임아상, 방효태가

    지휘하는 패강도행군, 옥저도행군을

    몰살시킨 싸움이다.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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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수전투는 제2차 고당전쟁중이던 고구려 보장왕 21년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당의 임아상, 방효태가 지위하는 패강도행군, 옥저도행군을 몰살시킨 싸움입니다.

    600년에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661년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평양으로 대군을 보냈고 임아상을 패강도 행군, 글필하력을 요동도행군, 소정방을 평양도행군, 소사업을 부여도행군, 방효태를 옥저도행군, 정명진을 누방도행군의 지휘자로 삼아 영남 수군, 돌궐과 위구르의 기병 등이 포함된 35군을 함께 육지와 바다로 나누어 공격합니다.

    당나라는 이전의 패배를 교훈삼아 요동방어선에서의 전면전을 피하고 이를 우회하여 평양에 상륙하여 포위하고 압록수에 들이닥치는 등 고구려의 중심부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소방정을 중심으로 평양성에 접근한 당나라군을 무력화시키고, 거란, 철륵 방면을 통해 당나라를 역습하여 소사업, 계필하력 등 북방 기병 군단을 퇴각시킵니다.

    이에 패강도행군과 옥저도행군, 남쪽의 신라군 보급부대는 평양도행군을 돕기 위해 평양으로 급속히 진군하고 그 과정에서 패강도행군과 옥저도행군이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과 만난것이 사수 전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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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발석거로 사수의 얼음을 깨 방효태가 이끄는 옥저도행군을 꼼짝 못하게 한 뒤, 연개소문은 패강도행군을 급습해 임아상이 난전 중 전사한다.[8]


    옥저도행군의 총사령관인 방효태는 영남의 수군을 이끌고 사수에 진영을 쳤는데, 연개소문이 사수 언덕에서 방효태에게 맞서 싸웠으며, 방효태가 대패하면서 수만명이 전사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유백영이나 조계숙의 진영에 가기를 원했지만 자신이 끌고온 영남 자제들이 모두 전멸했는데 자신 혼자만을 구할 수 없다고 이를 거부하며 싸우다가 그의 아들 13명과 함께 전사했다.[9]


    이후 소정방을 중심으로 살아남은 당군은 김유신의 구원을 받고 식량을 받은후 철군했다고 한다.


    이 전투까지 당나라는 6개 도행군 가운데 절반[10]이 총사령관을 잃었다. 당 고종의 요구로 고구려 영토 내로 진입해야 했던 신라군과 평양에서 헤메던 소정방군은 적지에서 싸그리 몰살당할 위기에 처했고, 고구려 입장에서는 지긋지긋한 전란을 단 한번에 완전히 종결시켜버릴 기회를 얻었다고 할 정도로 고구려의 결정적인 승전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김유신의 신라군은 놀라운 기동으로 고구려의 방위선을 우회한 뒤 폭설이 내린 날을 노려 소정방군을 압박하던 고구려군의 포위망을 풀어냈고, 소정방은 신라가 지원해준 보급품을 받은 뒤 바로 퇴각했다고 한다.


    이후 고구려군은 소정방과 김유신 양쪽을 추격했으나, 양쪽 모두에 치명적인 타격은 입히지 못한 채로 격퇴하는 정도만 성공한다. 비록 당나라군에 대해서는 이미 당나라군 수뇌부의 절반을 공중분해시킨 수준의 대타격을 입혔으니 덜 아쉬웠겠지만, 신라군의 재치있는 대처로 인해 신라군의 수뇌부에 결정타를 날리지는 못한 점은 많이 아쉬웠을 듯 하다.


    당나라에서는 소모전 전략에 이어 결정타를 날리려 했으나 이전부터 계속 공을 세우지 못했다고 평한다. 그리고 전쟁 일체의 중단을 선언하게 되었으며 웅진도독부에 대한 지배마저도 재고하고, 철군하거나 신라에 의탁하려 하였다. 하지만 유인궤의 결사적인 반대로 인해 결국 웅진도독부의 유지를 결정하고, 이는 수년 뒤에 신의 한 수로 작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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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맞습니다. 살수 대첩과 사수 전투는 다른 전투 입니다. 한자로도 1.살수 대첩(薩水大捷)과 2.사수전투(蛇水戰鬪) 는 다르고 살수대첩은 612년(영양왕 23년)에 일어난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이 승리로 이끈 전쟁이구요. 사수 전투는 약 50년후에 662년(보장왕21년) 고구려 연개소문이 승리로 이끈 전투 입니다. 물론 두 전쟁 다 고구려와 중국의 수나라, 당나라 와 전쟁 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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