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주 전투란 어떤 전투였는지 알고싶어요
우리나라는 많은 전투를 경험한 국가인데요, 과거 통주 전투는 어떤 전투였나요?
이 전투의 배경과 결과, 그에 따른 영향이나 다른 전투로 이어진 것은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조 정변후, 서기 1010년 제2차 여요전쟁에서 행영도통사 강조 휘하의 고려군 300,000명이 요성정 야율융서가 이끄는 거란군 200,000명에 크게 패배한 전투이자 한민족 역사상 최대 규모의 패전이었습니다. 흥화진에서 양규가 400,000명의 거란군을 상대로 수성에 성공하여 200,000명의 거란군을 묶어둔 덕분에, 통주에서 머릿수 자체로는 꿀리지 않는 전투를 벌일 수 있었고, 실제로 초반엔 고려군의 지속적인 방해 및 선전으로 팽팽히 맞섰으며, 고려군이 검차(劍車)로 거란 기병부대를 상대하여 상당한 전술적 성과를 내며 전투에서도 승리했지만, 그로 인한 치명적인 방심 탓에 고려군 지휘부가 공략당하여 허무하게 패배하였습니다.
현종은 나주까지 몽진을 해야했고, 강조는 포로로 끌려가 결국 처형되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를 정벌하기 우해 군사를 40만 대군을 이끌로 1010(현종 원년)에 공격합니다. 거란군은 흥화진을 공격하였으나 양규에게 패하고, 다시 11월 25일 통주를 공격합니다. 이 전투에서 30만 고려군을 이끌고 통주에서 나와 삼수채에서 강조가 초반에는 승리하였으나 자만하여 생포됩니다.
그리고 거란군은 삼수채 승세를 타고 통주성을 공격하였으나 최질,홍숙, 이원귀, 최탁 등이 공격했으나 실패합니다. 거란군은 통주성을 뒤로 놓고 개경까지 점령하고, 현종을 나주까지 피난갔지만 통주성 점령을 못해 후방 피습 및 병참로 차단으로 장기전을 하지 못하고 급하게 송과 단교 및 현종의 친조를 약속받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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