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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한발발이142
로맨틱한발발이14223.12.21

한국전쟁에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기 어려웠다는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북한이 남침을 하고 순식간게 낙동강 상류까지 몰아쳤을 때, 미국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전세가 바뀌었잖아요.

그런데 당시에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하기가 아주 어려워 반대가 심했다는데, 어떤 이유로 성공하기 어려웠던건가요?

그리고 그렇게 어려운걸 알면서도 굳이 인천으로 상륙한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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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산지가 70%인 한반도의 지형은 보급로가 끊어지면 전차 같은 중장비를 몽땅 버리고 몸만 빠져나오기도 힘들어지므로, 매우 비효율적인 후퇴를 강요할 수 있었다. 고속도로를 따라서 후퇴하면 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터널이 많아진 21세기 현재에나 어느 정도 가능한 이야기며 지금도 터널 몇개를 막으면 답도 없다. 게다가 한국의 고속도로는 산지와 인구밀집 지역을 피하기 위해 고가도로인 곳이 상당히 많다. 이런 가도에 탱크와 장갑차량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면 붕괴 위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적 포병이나 공군의 과녁이 되어버릴 게 뻔했다.

    준비되지 않은 국군만으로는 역부족이라고 판단하고 다음 계획(연합 상륙작전)을 구상한다. 참모장인 알몬드 소장에게 북한군의 병참선 중심부를 타격하기 위한 상륙작전 계획과 상륙지점을 연구를 지시하고 일본에 주둔한 미 제1기병사단에 상륙훈련을 지시했다. 또한, 7월 4일 상륙작전을 위한 공식 회의를 소집했다. 인천을 통해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한다는 일명 블루 하츠(Operation Blue Hearts) 작전이었다. 이 작전계획 역시 인천상륙작전으로 7월 22일에 실시하려고 했다. 인천으로 들어와서 교통로의 중심인 서울지역을 장악하면 북한군의 병참선을 끊을 수 있다는 건데, 그때는 북한군의 진격 속도가 너무 빠르고 게다가 상륙전 준비기간이 너무 길기 때문에 블루 하츠 작전은 7월 20일에 공식적으로 폐기된다.

    이후 낙동강 방어선을 펼쳤을 때 맥아더 장군은 부산 주변 포위선을 뚫으려 했다. 그러나 당시 병력에 많은 제한이 있던 시기이기 때문에 그에 관한 해법으로 폐기했던 블루하츠 작전(Operation Bluehearts)을 바탕으로 다시금 상륙작전계획을 세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작전명 Operation Chromite로 실행된 인천 상륙작전이다.

    맥아더 장군은 6.25 전쟁 당시 UN군 사령관이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는 태평양지역 총사령관이자 일본 점령 연합군사령관이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에서 세계 전사(戰史)상 가장 많은 약 50여 회의 상륙작전을 모두 성공으로 이끌었으며, 이를 통해 '상륙작전의 귀재'라는 별명을 얻었다. 맥아더가 수행한 상륙작전은 '아일랜드 호핑'이라고 불리며, 이는 일본군의 요새 하나하나를 격파하는 것이 아니고 후방으로 상륙을 해서 병참선을 끊고 섬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을 고립시켜 격퇴하는 전략을 의미한다. 이러한 그의 휘하 육군과 해병대의 경험을 십분 발휘하여, 맥아더는 적 후방으로 상륙작전을 감행해 적을 가두는 방식으로 전황을 일거에 뒤집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특히 북한군이 빈약한 육상보급으로 현재의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 보급선을 잘라버리면 침략군 전체가 와해할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북한군의 낙동강 전선까지의 육상 보급로인 경부선 철도와 경부 가도는 필연적으로 서울을 통과했고, 이는 곧 인천이 보급선을 완전히 끊을 최적의 위치임을 의미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일본 점령 사령관 당시 한반도 내 일본군을 몰아내고 무장해제를 시키는 임무를 담당했고, 이를 위해 1945년 9월, 그는 미군을 인천으로 상륙시켜 이를 달성하고 그 자료를 사무실에 보관하고 있었다. 즉 이미 대군을 인천으로 들여보냈던 경험이 이미 있었기에 상륙작전을 실시해야겠다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