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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빙23.06.16

조선시대에는 몇번에 반역이일어났나요?

조선시대에는 몇번의 반역이 일어났는지 누가 무슨이유로 반역을 일으켰는지도 궁금합니다 성공할뻔한 반역도 있다면 자세히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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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자 간의 싸움으로 '방석의 난·정도전의 난·무인정사의 난'이라고도 한다. 이 난은 정치적으로 보면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정도전 일파를 방원 일파가 타도하고 권력을 차지한 사건이지만, 이복 형제 간의 왕위쟁탈을 위한 골육상쟁의 현상으로도 볼 수 있다.


    1392년 8월, 태조는 둘째 부인 강씨의 소생인 방석(여덟째 아들, 당시 11세)을 세자에 책봉하였다. 태조는 원래 계비 강씨의 요구에 따라 일곱째 아들 방번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으나 공신인 배극렴·조준 등은 방번이 아직 어리고 자질이 세자에 적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방원의 세자 책립을 주장하였다. 이에 태조는 방번 대신 방석을 세자에 책봉하고 정도전으로 하여금 세자를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러한 처사에 한씨 소생의 아들들은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조와 강비 그리고 정도전의 방원에 대한 지나친 경계와 냉대는 결국 혈육간의 살육전을 야기하였던 것이다.


    방원은 방의, 방간 등 형제들과 함께 정도전 일파를 살해하기로 결심. 정도전 일파의 밀모설을 만든다.



    즉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이 밀모하여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다고 속이고 왕자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인 후 일거에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살육하려 한다는 것이다. 방원은 이를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이숙번 등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일파를 습격·살해하고 세자 방석은 폐위하여 귀양보냈다가 방번과 함께 죽여버렸다. 이 때 태조는 병중이어서 내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다가 뒤늦게 방번, 방석 형제가 살해당한 사실을 알고는 상심하여 왕위를 내놓았다.


    방원이 거사에 성공하자 하륜, 이거이 등 방원의 심복들은 그를 세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방원은 극구 사양했다. 장남인 방우는 1393년 이미 병사하였기 때문에 방원은 야심이 별로 없던 둘째 방과에게 세자자리를 양보하여, 방과가 세자에 책봉되고 곧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방원 일파는 정종 즉위 후 정사공신에 서훈되었으며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병권 집중과 증앙집권체제의 강화를 위한 제도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2차 왕자의 난 - 방간의 난 (1400)※


    역시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자 사이의 싸움으로, 박포의 난 또는 방간의 난이라고도 한다.



    1차 왕자의 난이 이복형제 간의 싸움인데 반해 2차 왕자의 난은 동복형제 간의 싸움이었으며..



    방원에 대한 방간의 시기심이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이 일로 방원은 세제(왕위계승자로 결정된 왕의 동생)의 자리를 확보하게 된다.




    제1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조선의 세력 구조는 방원 일파에게 유리하게 변하여 이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방원의 동복형제들은 여전히 사병을 거느리고 있어 이들은 방원에게 만만치 않은 위협 요소가 되고 있었다.



    특히 태조의 넷째 아들인 방간은 노골적으로 왕위 계승에 대한 야심과 호기를 드러내곤 하였으나 인격 · 공훈 · 위세가 방원에 미치지는 못하였다. 이에 방원은 정도전이 추진했던 병권집중운동을 이어받아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었다.


    방원이 정략적으로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할 조짐을 보이고 또한 왕위 계승에 대한 조정의 중론이 방원쪽으로 흐르자, 방간은 점차 시기심과 불만이 쌓여 갔다. 그런 와중에 박포가 방원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밀고하자, 방간은 그 진위를 가려보지 않은 채 사병을 동원하여 난을 일으킨 것이다.


    지중추 박포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등이 방원을 제거하려 한다고 밀고하는 등 방원을 도와 난을 성공적으로 수습한 공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공행상 과정에서 일등공신이 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죽주(지금의 영동)에 귀양보내지기까지 하였다.



    그러던 중 방간이 방원에게 불만을 품고 있음을 알고, 방간에게 방원이 장차 방간을 죽이려 한다고 거짓 밀고하였다. 방간이 이를 믿고 군대를 동원하자 방원도 군대를 동원하여 개경에서 싸움이 붙었는데, 형세가 불리하였던 방간은 방원에게 패배하여 유배되고 박포는 사형에 처해졌다.


    방간의 난이 수습된 후 조정의 대신들은 수차례에 걸쳐 방간을 죽여야 한다고 간언했으나 방원은 왕위에 오른 뒤에도 끝까지 그를 죽이지 않고 유배시키는 데 그쳤다.방원은 오히려 방간이 병이 나면 의원을 보내 그를 치료하게끔 도와주기도 하였다. 또한 방원이 상왕으로 있던 세종의 치세 때에도 방간에 대한 치죄가 논의되었지만 방원과 세종은 이를 거부하였다. 방간은 방원의 배려에 따라 천명을 누리다가 1421년 홍주에서 죽었다.




    ※계유정난 (1453)※


    1453년(단종 1년)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이다.세종의 뒤를 이은 병약한 문종은 자신의 단명을 예견하고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 등에게 자기가 죽은 뒤 어린 왕세자가 등극하였을 때 그를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였다. 세 사람 중 남지는 병으로 좌의정을 사직하였으므로 그의 후임인 정분이 대신 당부를 받았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1453년 문종의 유탁을 받은 세 정승 가운데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김종서의 집을 불시에 습격하여 그와 그의 아들을 죽였다. 이 사변 직후 수양대군은 '김종서가 모반하였으므로 죽였는데, 사변이 너무 급하게 일어나 아뢸 틈이 없었다.'고 사후에 상주하였고, 곧 이어 단종의 명이라고 속여 중신을 소집한 뒤, 사전에 준비한 생살계획에 따라 황보인, 이조판서 조극관, 찬성 이양 등을 궐문에서 죽였으며 좌의정 정분과 조극관의 동생인 조수량 등을 귀양보냈다가 죽였다. 또 수양대군은 자신의 친동생인 안평대군이 '황보인·김종서 등과 한 패가 되어 왕위를 빼앗으려 하였다.'고 거짓 상주하여 강화도로 귀양보냈다가 후에 사사하였다.


    수양대군은 10월 10일의 정변으로 반대파를 숙청한 후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그는 영의정과 이조·병조 판서, 내외병마도통사 등을 겸직하였고 정인지를 좌의정, 한확을 우의정으로 삼았으며 집현전으로 하여금 수양대군을 찬양하는 교서를 짓게 하는 등 그의 집권태세를 굳혀갔다. 이 정변이 계유년에 일어났으므로 이를 계유정난이라 하는데 이 사건에 공이 있다 하여 수양대군 자신과 정인지 · 한확 · 이사철 · 박종우 · 이계전 · 박중손 · 김효성 · 권람 · 홍달손 · 최항 · 한명회 등 37명을 정난공신에 봉하였다.




    ※이징옥의 난(1453)※


    이징옥(?∼1453)의 본관은 양산으로, 중추원지사 전생의 아들이다.어렸을 때 호랑이를 산 채로 잡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용감하였다. 세종 초에는 김종서를 따라 북변에 종군하여 1424년에는 경원진 첨절제사가 되어 여진족의 침입을 격퇴하였다. 1436년 회령부판사로서 여진족의 추장을 살해하였으며, 이 해 경흥도호부판사에 올랐다.


    1449년 중추원지사로 승진하였으며, 1450년 세종 때 북방 6진 개척에 크게 공헌했다 하여 김종서의 후임으로 함길도 도절제사가 되었다. 그런데 1453년 정권을 획득한 세조가 이징옥이 김종서계의 인물임을 꺼려서 이징옥을 파직하고 그 후임에 박호문을 임명, 함길도에 보냈다.이징옥은 박호문에게 자리를 인계하고 호위병력 약간을 거느리고 서울로 가는 길에 계유정난에 관한 소식을 듣고는 되돌아가, 박호문을 죽이고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를 '대금황제'라고 불렀다. 한편 여진의 후원을 약속받고 두만강 건너편의 오국성에 도읍을 정하기로 결정, 두만강을 건너려고 종성에 머물 때 종성판관 정종, 호군 이행검 등의 습격을 받고 아들 3명과 함께 살해되었다.


    계유정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이징옥의 난은 조선정부에 대한 최초의 반란이었다. 이 사건 이후에 함경도 지역에 대한 차별대우가 더욱 심화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이시애의 반란(1467년, 세조 13년)이 일어나는 하나의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시애의 난※


    1467년(세조 13년) 함경도의 호족 이시애가 일으킨 반란을 가리킨다.세조는 즉위하면서 중앙집권의 강화를 위해 북도 출신 수령의 임명을 제한하고 경관으로 대체하였으며 수령들에게 지방유지들의 자치기구인 유향소의 감독을 강화하게 하여 출신인 수령들과 유향소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회령부사를 지내다가 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퇴한 이시애는 유향소의 불만·불평과 백성의 지역감정에 편승해서 아우 시합, 매부 이명효와 반역을 음모하고 1467년(세조 13년) 5월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함길도의 절도사가 진장들과 함께 반역을 음모하고 있다.'고 선동하여 절도사 강효문, 길주목사 설징신 등을 죽였으며, '방금 남도의 군대가 바다와 육지로 쳐올라와서 함길도 군민을 다 죽이려 한다.'고 선동하자 흥분한 함길도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유향소를 중심으로 일어나 타도 출신 수령들을 살해하는 등 함길도는 대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또한 그는 중앙에서도 '병마절도사 강효문 등이 서울의 한명회·신숙주 등과 결탁하여 함길도 군대를 이끌고 서울로 올라가서 모반하려 하여 민심이 흉흉하니 함길도 사람을 고을의 수령으로 삼기 바란다.'는 등의 모략전술을 폈다. 세조는 이에 속아 신숙주 등을 투옥하였다가 곧 구성군 준을 병마도총사로 삼아 토벌군을 출동시켰다.


    이시애는 여진족까지 끌어들여 대항하였으나 허종·강순·어유소·남이 등이 이끄는 3만 군대는 홍원 · 북청을 돌파하고 이원의 만령에서 반란군 주력부대를 분쇄하였다. 이시애는 길주를 거쳐 경성으로 퇴각하여 여진으로 도망치려 하였다. 이 당시 사옹별좌의 벼슬에 있던 이시애의 처조카 허유례는 자기 부친이 억지로 이시애의 일파에게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이시애의 부하인 이주·황생 등을 설득하여 이들과 함께 이시애 형제를 묶어 토벌군에게 인계하였다.


    8월 이시애 등이 토벌군의 진지 앞에서 목이 잘림으로써 3개월에 걸쳐 함경도를 휩쓴 이시애의 난은 평정되었다. 이 난으로 길주는 길성현으로 강등되고 함길도는 남·북 2도로 분리되었으며 유향소도 폐지되었다. 구성군 준과 조석문·어유소·허종·허유례 등 41명은 조선의 제6차 공신인 정충적개공신으로 녹훈되었다.




    ※남이의 옥(남이의 역모사건, 1468)※


    1468년(예종 즉위년) 남이 등이 역모를 꾀하였다 하여 처형한 사건이다.의산위 휘와 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남이는 일찍부터 무반의 기질을 나타내어 1457년(세조 3년) 17세로 무과에 급제한 뒤 세조의 신임을 받아 여러 무반직을 역임하였다. 1467년 이시애의 반란을 토벌한 공으로 적개공신의 칭호를 받고 의산군에 봉해졌으며 건주위의 오랑캐를 토벌한 공로로 공조판서를 거쳐, 27세로 병조판서에 임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예종이 즉위한 뒤 한명회, 신숙주 등은 노골적으로 남이를 견제하기 시작하였는데 강희맹, 한계희 등 훈구대신들의 입을 통해 남이가 병조판서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비판하자 예종은 그를 병조판서에서 해임하고 겸사복장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남이가 궁궐에서 숙직하던 중 혜성이 나타나자 "혜성이 나타난 것은 묵은 것을 제거하고 새 것을 펼칠 징조이다."라고 말하였는데 병조참지 유자광이 이 말을 듣고 곧바로 남이가 반역을 꾀하였다고 모함하였다.


    이 때 남이를 비롯하여 강순·변영수·조경치·문효량 등 약 30명의 관련 인물들이 국문을 받고 처형�고 그 가족들은 노비로 전락하였다.



    이 옥사는 그 진위 여부와는 별개로, 순탄하지 못한 과정을 거쳐 즉위한 세조가 왕권강화를 도모하다가 죽고 어린 왕이 새로 즉위하는 등 유동적인 정국 상황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한편으로는 한명회, 신숙주 등의 원상세력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등장한 신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남이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매우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으나, 그 뒤 사림이 세력을 잡고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평가하는 과정에서 유자광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상대적으로 남이의 옥사 역시 유자광이 조작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일부 야사에서는 남이를 젊은 나이에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은 영웅적 인물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연려실기술』의 기록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남이는 순조 때 그의 후손 남공철의 상소에 의해 신원되었으며 방계인 남용익 · 남유용 · 남공철 등이 빛을 볼 수 있었다.




    ※중종반정(1506)※


    1506년(연산군 12년) 성희안·박원종 등이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이다.


    이조참판을 지낸 성희안과 중추부지사 박원종은 재위 12년간 화옥과 황욕 등 폭정으로 국가의 기틀을 흔들어놓은 연산군을 폐하기로 밀약하고 당시에 인망이 높던 이조판서 유순정, 연산군의 총애를 받고 있던 군자부정 신윤무 등의 호응을 얻어 왕이 장단 석벽에 유람하는 날을 기하여 거사하기로 계획을 꾸몄다.1506년 9월 1일, 박원종 · 성희안 · 신윤무를 비롯해서 전 수원부사 장정, 군기시첨정 박영문, 사복시첨정 홍경주 등이 무사를 규합하여 훈련원에 모았다.


    그들은 먼저 권신 임사홍·신수근과 그 아우 신수영 및 임사영 등 연산군의 측근을 죽인 다음 궁궐을 에워싸고 옥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 종군하게 하였다. 이튿날인 9월 2일 박원종 등은 군사를 몰아 텅 빈 경복궁에 들어가서 대비의 윤허를 받아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을 맞아 왕으로 옹립하니 그가 조선왕조 제11대 왕인 중종이다.




    ※임꺽정의 난※


    일명 거정. 양주의 백정이었으나 정치의 혼란과 관리의 부패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1559년(명종 14) 불평분자들을 규합,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창고를 털어 곡식을 빈민에게 나누어 주고 관아를 습격, 관원을 살해했다. 한때는 개성에 쳐들어가 포도관 이억근을 살해하기도 했다.


    백성들의 호응으로 관군의 토벌을 피했으나 1560년 형 가도치와 참모 서림이 체포되어 그 세력이 위축되다가 1562년 토포사 남치근의 대대적인 토벌로 구월산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정여립 모반 사건 (1589)※


    정여립(1546∼1589)은 본관은 동래, 자는 인백으로 전주 출생이다.경사와 제자백가에 통달했으나 성격이 포악하고 잔인하였다.


    1570년(선조 3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이·성혼의 문인이 되었다.1583년 예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수찬으로 퇴관하였다. 본래 서인이었으나 집권한 동인에 아부, 죽은 스승 이이를 배반하고 박순·성혼 등을 비판하여 왕이 이를 불쾌히 여기자 다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고향에서 점차 이름이 알려지자 정권을 넘보기 위하여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를 조직, 신분에 제한없이 불평객들을 모아 무술을 단련시켰다. 1587년 전주부윤 남언경의 요청으로, 침입한 왜구를 격퇴한 뒤 대동계의 조직을 전국에 확대,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 해주의 지함두, 운봉의 승려 의연 등의 기인모사를 거느리고 정감록의 참설을 이용하는 한편 망이흥정설을 퍼뜨려 민심을 선동하였다.


    1589년 거사를 모의, 반군을 서울에 투입하고 일거에 병권을 잡을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안악군수 이축이 이 사실을 고변하여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히자 아들 옥남과 함께 죽도로 도망하였다가 관군에 포위되자 자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날 조짐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지만 선조는 정여립 모반 사건 처리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이때 낙항해 있던 정철이 선조에게 추국관을 자청하여 정여립을 포함한 1,000여 명이상의 관련자들이 처형 또는 귀양을 보내게되는 기축옥사가 일어났으며 전라도를 반역향이라 하여 호남인들의 등용이 제한되었다.





    ※김직재의 옥(1612)※


    대북파가 영창대군 지지파인 소북파를 몰아내기 위해 꾸민 첫번째 사건은 1612년 일어난 '김직재의 옥'이었다. 이 사건은 황해도 봉산군수 신율이 병역 회피를 위해 어보와 관인을 위조한 김경립을 체포하면서 시작된다. 신율은 그를 체포한 후 유팽석을 고문하여 김경립이 모반을 획책하기 위해 어보와 관인을 위조했다는 내용의 자백을 받아내고 다시 김경립을 문책하여 거대한 역모 사건 계획을 자백 받기에 이른다.


    김경립이 자백한 내용을 요약하면 8도에 각각 대장, 별장 등을 정하여 불시에 한양을 함락시키고 대북 세력 및 광해군을 축출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김경립의 아우 김익진의 입을 통해 팔도도대장으로 내정된 사람이 김백함이라는 자백이 나오자 사건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김백함이 팔도도대장으로 내정되었다는 진술을 받아낸 대북파는 김직재와 김백함 부자는 물론 김직재의 사위 황보 신 및 그 일족을 모두 체포하여 모진 고문을 가한다. 이 고문 과정에서 김백함은 아버지 김직재의 실직에 불만을 품고 모의를 했다는 자백을 강요받았으며 고문을 이기지 못해 결국 모든 내용을 시인하게 된다. 또한 김직재는 자신이 역모의 주동자이며 연흥부원군 이호민, 전 감사 윤안성, 전 좌랑 송상인, 전 군수 정호선, 전정언 정호서 등 일군의 소북파 인사들과 모의하여 특정한 날을 잡아 도성을 무너뜨리려고 했다고 허위자백하기 까지에 이른다.


    이 사건은 소북파의 거두이자 선조의 유명을 받든 일곱 신하 중 하나였던 박동량의 반대 상소에도 불구하고 옥사로 이어졌고 그들 역모 세력이 추대하려던 왕이 선조의 아들 순화군의 양자인 진릉군 이태경이라고 함에 따라 그도 처형되었으며, 그들과 관련이 있는 대부분의 인사는 모두 숙청되었다. 이 옥사로 김직재, 김백함 부자가 처형당하 고 김제, 유열 등 1백여 명의 소북파 인사들이 대거 숙청당했다.




    ※칠서의 옥(1613)※


    1613년(광해군 5년) 문경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수백 냥을 약탈한 강도 사건이 발생했다.이 때 그 범인 일당은 영의정을 지낸 박순의 서자 박응서, 심전의 서자 심우영, 목사를 지낸 서익의 서자 서양갑, 평난공신 박충갑의 서자 박치의, 박유량의 서자 박치인, 북병사를 지낸 이제신의 서자 이경준, 서얼 허홍인 등 권력가들의 서자 일곱 명이었다. 이들은 허균, 이사호, 김장생의 이복동생 김경손 등과 사귀면서 스스로를 죽림칠현 또는 강변칠우라고 칭하는 무리였다.


    이들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서얼의 차별을 없애달라는 상소를 한 바 있는데 이것이 거부당하자 불만을 품고 1613년 초부터 경기도 여주 남한강변에서 당을 조직한다. 이들은 윤리가 필요 없는 집이라는 뜻의 '무륜당'을 짓고 그곳을 근거지로 소금장수, 나무꾼 등으로 행세하며 전국에 출몰하여 화적질을 일삼다가 새재에서 상인들을 죽이고 돈을 약탈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이 때 피살된 상인의 노비가 이들의 뒤를 미행하여 근거지를 알아내고 포도청에 고발함으로써 이들은 일망 타진되었다.


    하지만 이 '칠서의 옥'은 단순한 강도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이첨 등 대북파의 중심 세력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영창대군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이첨과 그의 심복 김개, 김창우 등은 포도대장 한희길, 정항 등과 모의하여 이들 서얼 출신 화적들이 자금을 모아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자백을 얻어낸다. 이러한 자백은 칠서 중에 하나인 박응서가 광해군에게 비밀 상소를 올리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박응서는 이 상소문에서 자신들을 1608년에 명나라 사신을 저격한 바 있으며 이를 통해 사회 혼란을 야기시키고 한편으로는 군자금을 비축하고 무사를 모아 사직을 도모하려 하였고, 성사된 뒤에는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인목대비로 하여금 수렴청정을 이루려 하였다고 했다. 이 상소문의 파장은 대단했다. 박응서의 상소 이후 대북 세력은 서양갑을 국문한 끝에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자신들의 우두머리이며 인목대비 또한 영창대군이 장성하면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모의에 가담하기로 했다는 자백을 얻어내게 된다.


    이 사건으로 종성판관 정협을 비롯하여 선조로부터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의 안위를 부탁받은 신흠, 박동량 등의 일곱 대신 및 이정구, 김상용, 황신 등의 서인 세력 수십 명을 하옥시켰다.또한 이 사건의 취조 과정에서 김제남과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양자로 삼았던 의인왕후의 능에 무당을 보내어 저주했던 일이 발각되기도 했다. 그래서 김제남은 사사되고 그의 세 아들도 화를 당하였으며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위리 안치되었다가 이듬해 강화부사 강항에게 살해되었다. 이 사건으로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이항복을 비롯한 서인, 남인 세력이 완전히 제거되고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계축년에 일어난 이 사건이 '계축옥사'이다.




    ※인조반정(1623)※


    1623년(인조 1년)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후의 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이다.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당론의 폐해를 통감하고 이를 초월하여 좋은 정치를 해보려고 애썼으나, 자신이 대북파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당론을 초월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이원익·이항복·이덕형 등 명망 높은 인사를 조정의 요직에 앉혀 어진 정치를 행하려 하였으나, 이이첨·정인홍 등 대북파의 무고로 친형 임해군과 이모제 영창대군을 죽였으며, 또 계모인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패륜을 자행하였다.


    이와 같이 광해군의 실정이 계속되어 기강이 문란해지자 서인 이귀 · 김자점 · 김류 · 이괄 등은 반정을 모의, 1623년 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모든 계획을 추진하였다.


    도중에 이이반의 누설로 탄로될 위기에 놓였으나 예정대로 거사를 단행하였다. 이서는 장단에서, 이중로는 이천에서 군사를 일으켜 홍제원에서 김류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이 군대를 능양군이 친히 거느리고 이괄을 대장으로 하여 12일 밤에 창의문으로 진군하여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응으로 반정군은 무난히 궁궐을 점령하였다. 이어 왕대비(인목대비)의 윤허를 얻어 능양군(인조)이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의관 안국신의 집에 피신하였다가 잡혀 서인이 되었으며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대북파 이이첨 · 정인홍 · 이위경 등 수십 명은 참수되었으며, 추종자 200여 명은 유배되었다. 반정에 공을 세운 이귀·김류 등 33명은 3등으로 나누어 정사공신 호를 받고 권좌의 요직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이 논공행상이 공평하지 못하다 해서 1년 후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반정 후 남인의 이원익이 영의정에 영입됨으로써 남인도 제2의 당세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괄의 난(1624년)※


    1624년(인조 2) 평안병사 이괄이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반란.


    이괄은 인조반정에 공이 많았는데도 논공행상에는 반정계획에 늦게 참가하였다 하여 2등공신이 되고 한성부윤에 임명되었다. 그러던 중 후금의 관서 지방 침입에 대비하면서 이괄을 부원수 겸 평안병사에 임명하여 도원수 장만 휘하에 소속시켰다. 이괄은 이에 대한 불만으로 반란을 일으켜 개천을 점령하고 평양으로 진격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때 영의정 이원익을 도체찰사로 삼아 반란군을 토벌하게 하였으나 이괄의 부대는 중앙에서 보낸 군대를 격파하고 한성까지 점령하였다. 이에 이괄은 선조의 열번째 아들 흥안군을 왕으로 추대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정부군의 패잔병을 수습한 장만은 그날 밤 바로 한성 근교의 안령에서 이괄의 부대를 크게 파하였다. 이에 패잔병을 이끌고 광희문을 빠져나온 이괄은 경기도 이천으로 달아났으나 자신의 부하 기익헌·이수백 등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다. 그리고 기익헌·이수백이 관군에 투항하면서 반란은 평정되었다.




    ※심기원의 옥※


    1644년(인조 22) 남한산성 수어사로 있던 심기원이 회은군 덕인을 왕으로 추대하려다가 복주된 사건. 심기원은 유생의 신분으로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1등공신에 녹훈되었고 청원부원군에 봉해진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을 지내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가 1644년(인조 22) 좌의정으로 남한산성 수어사를 겸하였을 때 회은군을 추대하여 반란을 꾸몄다는 고발을 받아 여러 공모자가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 모의의 사실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 사건의 전모는 심기원이 자신의 심복 장사들을 호위대에 두고 이일원·권억 등과 함께 회은군을 추대하기 위해 모반을 꾀한 것으로 밝혀져 있다.


    이 사건은 심기원의 부하였던 황헌·이원로 등이 훈련대장 구인후에게 밀고함으로써 드러났는데, 그 결과 심기원 일당과 회은군은 죽임을 당하였다. 이때 중국에 잡혀가 있던 임경업도 이 모반에 연루되었다고 해서 소환되어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그리고 병자호란 뒤에는 심기원·최명길이 협력하여 김자점 중심의 세력과 대립하고 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인조대의 정국은 김자점에 의해 권력이 독점되었다.




    ※김자점의 역모사건※


    1651년(효종 2) 김자점의 반역행위로 야기된 옥사. 봉림대군은 효종 임금에 즉위하여 병자호란으로 당한 국치를 설욕하고자 김상헌 등의 신하들과 협의하여 청나라를 정벌할 계획을 세웠다. 본래 친청파였던 김자점은 영의정에서 파직된 뒤 기회를 노리고 있던 차 그 소식을 듣고 청나라 관계 요인에게 밀고하는 한편, 송시열이 지은 장릉의 지문을 청나라에 보냈다. 이 지문에서는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고 명나라 연호를 썼으므로, 청나라는 대군을 국경에 배치하고 그 진부를 힐문하였다. 조정에서는 영의정 이경석의 노력에 힘입어 이를 수습하여야 하였다.


    그런데 1651년(효종 2) 12월에 진사 신호 등이 상소하여 김자점의 역모를 고하였다. 이에 효종은 인정문에서 김자점의 아들 익 등을 심문하였고, 익은 공모한 무장들을 모두 실토하였다. 이 과정에서 인조의 후궁이자 효명옹주의 어머니인 조귀인이 자신의 며느리인 숭선군의 아내 신씨를 저주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효종은 조귀인을 사사하는 한편, 김자점 및 그의 손자이며 조귀인의 사위인 김세룡을 국문하여 이들을 처형하였다. 이로써 김자점의 일파는 완전히 숙청되었다.



    ※이인좌의 난※


    1728년(영조 4) 3월 이인좌를 비롯한 소론과 남인이 영조의 집권에 반발하여 일으킨 반란으로서 무신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소론은 경종 연간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노론과의 대립에서 일단 승리하였으나, 노론이 지지한 영조가 즉위하자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박필현 등 소론의 과격파들은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며 경종의 죽음에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 밀풍군 탄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남인들도 일부 가담하였다.


    이들의 거병에는 유민의 증가, 도적의 치성, 기층 민중의 저항적 분위기가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그리하여 반군은 지방의 사족과 토호가 지도하고 중간계층이 호응하며, 일반 군사는 점령지의 관군을 동원하거나 임금을 주어 동원하는 형태로 구성되었다. 이인좌는 1728년(영조 4) 3월 15일 청주성을 함락하고 경종의 원수를 갚는다는 점을 널리 선전하면서 서울로 북상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24일에 안성과 죽산에서 관군에게 격파되었고, 청주성에 남은 세력도 상당성에서 박민웅, 김중만 등의 창의군에 의해 무너졌다.


    영남에서는 정희량이 거병하여 안음·거창·합천·함양을 점령하였으나 경상도관찰사가 지휘하는 관군에게 토벌 당했다. 그리고 호남에서도 거병 전에 박필현 등의 가담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난의 진압에는 병조판서 오명항 등 소론 인물들이 적극 참여하였으나, 이후 노론의 권력장악이 가속화하였고 소론은 재기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정부에서는 지방세력을 억누르는 정책을 강화하였고 토착세력에 대한 수령들의 권한이 커져갔다.




    ※나주괘서사건※


    1755년(영조 31) 1월 22일, 나주목의 객사인 망화루 기둥에 괘서가 나붙었다.“간신이 조정에 가득하여 백성이 도탄에 빠졌있다. 백성이 곤궁한데 가렴주구는 더욱 심하다. 이를 구제하기 위해 군사를 움직이려 하니, 백성은 놀라 동요하지 말라.” 이 괘서의 내용은 곧바로 전라감사 조운규에게로 보고되었다. 그리고 조운규는 2월 4일 이를 조정에 보고하면서, 그 주동자를 나주에 유배되어 있던 전 지평 윤지라고 하였다.


    윤지는 숙종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임인무옥을 일으킨 김일경의 옥사에 연좌되어 1724년(영조 즉위년)에 나주로 귀양갔다. 그리고 그는 유배지인 나주에서 그의 아들 윤광철을 통해 필묵계를 조직하였다. 이 필묵계는 표면적으로는 상부상조를 위한 모임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종의 비밀결사였다. 윤지는 계를 통해 동조자를 규합하여 거사를 계획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나주목사 이하징 등과 모의하여 동지규합에 나섰다. 그리고 마침내 나주객사에 괘서를 붙였던 것이다.


    이 사건을 접한 조정에서는 사태를 심각하게 생각하였다. 괘서의 내용이 정국을 비판한 것이기도 했지만, 윤지가 김일경의 당인으로 지목되어 유배된 소론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윤지가 소유한 문서 중에 소론 인사들과 주고받은 수상쩍은 서찰들이 다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보고를 받은지 7일만에 윤지를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그리고 영조가 직접 심문하였다. 영조는 이 사건을 계기로 이종성 · 박문수 등 몇 사람을 제외하고, 박사집 · 박찬신 등 소론 준론의 명문 가문과 유수원 · 신치운 등 우수한 학자들을 대거 처형하였다. 이로써 준론·완론 할 것없이 소론의 명문가들이 대부분 몰락하고 말았다. 영조가 이 사건을 이용하여 또다시 정계개편을 단행한 것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영조는 3월 5일 태묘에 고유제를 지내고 친히 명정전에서 소론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교서를 반포하였다. 즉, 경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이후에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이 모두 소론에 근원하고 있으며, 자신이 이들을 엄히 다스리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로써 영조는 즉위 이후 계속된 노론과 소론의 충역시비를 정리하였고, 노론은 완전히 정권을 독점하는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영조는 『천의소감』을 편찬하여 자신의 세제책봉과 즉위에 대한 정당성을 천명하였다.




    ※정조 암살미수사건※


    즉위하기 전에 정순왕후와 숙의 문씨 등의 왕실세력과 홍인한·정후겸 등의 척신 세력으로부터 여러 차례 곤란을 겪었던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이들에 대한 정치적 탄압을 감행하였다. 홍인한과 정후겸을 귀양보내고, 문숙의의 착호를 삭탈하고 사저로 쫓아냈다. 그리고 문숙의의 동생 문성국과 그의 어미를 노비로 만들었다. 대비인 정순왕후를 직접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동생 김구주 일파를 숙청하였다. 뿐만 아니라 척신들과 결탁하여 부당하게 정치에 끼어든 환관들도 대대적으로 개편하였다.


    정조의 이러한 조치는 그와 반대편에 있었던 여러 사람들을 긴장하게 하였다.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가담하고 세손으로 있던 정조를 핍박했던 이들은 특히 그러하였다. 이들로서는 무엇인가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궁지에 몰린 이들은 결국 정조를 암살하려는 계획까지 모색하였다. 정조 초년에 있었던 모역사건이 그것이다.


    그 모역사건은 홍인한과 함께 노론 벽파의 대표격이었던 홍계희 집안에서 도모하였다. 홍계희는 나경언으로 하여금 사도세자의 행적을 영조에게 과장되게 고하도록 하여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정조가 즉위하기 전인 1771년(영조 47)에 이미 죽었지만, 그 가문은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이 즉위한 것을 누구보다도 불안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홍계희의 손자인 홍상범은 궁중에 암살단을 난입시켜 정조를 살해할 것을 모색하였다.


    정조를 암살할 방안을 모색하던 홍상범은 천민 출신의 장사인 전흥문을 포섭하였다. 홍상범은 가난한데다 장가도 못간 전흥문에게 먼저 재물을 주면서 혼인까지 시켜주었다. 이로써 홍상범은 전흥문을 자신의 휘하에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홍상범은 다시 궁성을 경호하는 호위군관 강용휘를 포섭함으로써 뜻을 같이하는 20여 명의 무사까지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리하여 홍상범은 전흥문과 강용휘에게 각각 칼과 철편을 들고 궁궐에 난입하게 하고 자신은 나머지 20여 명을 거느리고 뒤를 따라 정조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여기에는 강용휘의 조카인 별감 강계창과 궁중 나인인 월혜가 궁중 길의 안내자로 포섭되어 있기도 하였다.


    1777년(정조 즉위) 7월 28일, 홍상범은 마침내 거사일을 정하였다.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홍지해를 귀양보내는 등 자신의 집안에 압박을 가해오는 상황에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전흥문은 미리 모의한 대로 칼을 들고 강용휘는 철편을 들고 궁궐에 잠입하였다. 홍상범도 20여 명의 행동대원을 이끌고 뒤를 따랐다. 이들은 강계창과 월혜의 길안내로 정조가 머물고 있는 경희궁 존현각까지 별 어려움 없이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강용휘와 전용문은 민첩하게 존현각 지붕위로 올라갔다. 정조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곧바로 정조의 호위무사에 의해 발각되고 말았다. 정조에 대한 이들의 암살 기도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한 국문이 있었다. 그 결과, 이 사건은 홍상범·홍대섭 등이 주도하였음이 드러났다. 또 홍상범의 노비인 최세복이 유배된 홍술해 등과 긴밀히 연락하면서 이 사건을 꾸민 것이 밝혀졌다. 정조는 평양감사를 지낸 홍상범의 아버지 홍술해·홍지해 형제, 그리고 그 홍상범의 사촌이었던.. 승지 홍상간 등까지 유배를 보내면서 이 사건을 처리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궁궐난입 사건에 대한 조사가 벌어지고 있을 때 또다른 사건이 발생하였다 유배당한 홍술해의 처 효임이 영험하다고 소문난 무당 점방을 끌어들여 정조와 홍국영을 저주했던 것이 발각된 것이었다. 효임의 의뢰를 받은 무당 점방은 다섯 군데의 우물물을 담은 다음 홍술해 집의 우물과 홍국영 집의 우물에서 길어온 물을 합쳐 한 그릇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물을 귀양간 홍술해 집의 우물에 부음으로써 정조를 보호하고 있는 홍국영의 기를 빼앗는다는 것이었다. 또한 붉은 모래로 정조와 홍국영의 형상을 만든 다음, 여기에 화살을 꽂고 땅에 묻었다. 그리고 나서 홍국영의 집에다 저주하는 부적을 만들었다. 그렇지만 미신에 의존했던 이러한 저주사건은 곧바로 발각되었고, 관련자들은 다시 검거되고 말았다.


    그러나 정조에 대한 홍계희 가문의 모반사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홍계희의 팔촌에 해당하는 진선 홍계능이 홍상범의 사촌인 홍상길과 모의하여 정조를 암살하고 사도세자와 경빈 박씨 사이에 태어난 은전군 찬을 국왕으로 추대하려고 했던 사실이 다시 발각되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홍계능의 아들인 홍신해, 조카인 홍이해, 홍경해의 아들인 홍상격 등과 홍계능의 제자인 전 승지 이택축, 전 참판 민홍섭 등이 가담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혜경궁 홍씨의 친동생이자 정조의 외삼촌인 전 승지 홍낙임까지 연루되어 있었다. 이처럼 계속되는 외척세력의 역모 사건에 정조는 단호하게 대처하였다. 그리하여 은전군을 자진시키고 주동자 23명을 사형시켰다.


    이처럼 즉위 초에 있었던 3대 모반사건은 정조의 신변에 대한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전 · 현직 벼슬아치뿐만 아니라 환관과 궁녀, 그리고 임금을 보호해야 할 호위군관까지 여기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이에 홍국영으로 하여금 숙위소를 설치하여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게 하였다. 이를 계기로 홍국영은 숙위소에서 모든 정사를 결제하면서 정조의 반대세력에 대한 숙청작업을 단행하게 되었다.


    ※홍경래의 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평안도지역은 국경과 인접해 있어 조선 초기에는 반란의 위협 때문에 조선 중기부터는 성리학적 기준에 의해‘학문도 예의도 모르는 지역’으로 인식되어 정치적으로 차별대우를 받았고 평안도 출신은 개인의 능력에 관계없이 관직에 진출할 수 없었다. 또한 이 지방은 삼남 지방과는 달리 사족세력의 형성이 미약하여 향촌의 지배질서도 비교적 느슨했기 때문에 신분적 제약도 비교적 약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791년(정조 15)에 신해통공이 실시되면서 상업의 자유화가 어느 정도 인정되었고 청과의 국경지역에 위치한 평안도는 국제 교역과 국내 상업분야에서 성장을 거듭하여 18세기에는 전국에서 상업이 가장 번성한 지역으로 부상하였다. 또한 금은 등의 수요증가로 평안도 지역에 광산이 개발되고 1801년(순조 1)에는 6만여 명의 공노비가 해방되어 이들이 일감을 찾아 평안도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이러한 특성과 시대적 상황 때문에 평안도 지역은 궁극적으로는 반봉건 근대화를 지향한 선진지역으로 발전하였고, 강한 반정부적 성향을 보이고 있었다. 홍경래의 난은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난의 주동자 홍경래는 평안도 용강군 화장골에서 평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중화에 사는 외삼촌에게서 글을 배운 후 스스로 공부하여 평안도 지방에서 실시한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건국 초기부터 이어져 온 서북인 등용 배제 정책 때문에 과거에 합격해도 관직을 받을 수 없었다. 여기에 당시 세도정치로 인한 가혹한 세금징수 때문에 평안도 지역은 민심이 흉흉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이미 말한 이유로 신흥 부자들이 속속 나타났고, 정부의 평안도 지역 차별에 반발한 홍경래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신흥 부자들을 포섭하여 당을 만들고 가산 다복동에 거점을 마련하여 수년 간 무기를 만드는 등 봉기 10년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홍경래는 당초 1812년(순조 12)에 거사할 계획이었으나 정보가 새나가 거사를 앞당겨 1811년 12월에 봉기하여 관서 일대를 무난히 점령했다. 이때 봉기하면서 이들은 정부에 전면전을 선포하였다.


    홍경래군의 지휘부는 평서대원수 홍경래, 부원수 김사용, 부모주 김창시, 선봉장 이제초·홍총각 후군장 윤후겸, 군수총관 이희저로 구성되어 있었다. 홍경래는 풍수장이로 부호의 집에 출입하던 우군칙을 가산 청룡사에서 만나 시국을 논의하다가 서로 공감하고 봉기하기로 약속하였다. 또한 홍경래는 시국에 불만이 있는 자들과 부의 축적을 통해 새로운 지배층으로 성장한 부류 및 황해도·평안도 일대의 상인들에게 접근하였으며, 벼슬길이 막힌 현실에 불만을 품고 있던 양반 지식층에게도 접근하여 진사 김창시 등을 포섭하였다. 그리고 거부 이희저를 회유하고 홍총각과 이재석등을 뽑아 선봉장으로 삼았으며, 지략과 무용을 겸한 김사용과 함께 가산 다복동을 중심으로 봉기준비를 했다.


    홍경래와 만나서 봉기를 약속한 우군칙은 평안도 태천 출신으로 홍경래의 모사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는 풍수에 밝아 가산 동북면에 살면서 묘터를 봐주고 점을 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홍경래와 만난 후 풍수와 점복을 이용하여 가산의 거부인 이희저를 끌어들여 군비의 조달을 맞게 했고, 인삼밀매 금지법에 불만을 품은 개성·의주 둥지의 거상과 부호들을 회유하여 세력을 확대했다. 또한 당시에 광산 채굴이 성행하여 부랑자들이 광산으로 몰리는 것을 이용하여 운산 촛대봉에 광산을 열고 임금 노동자들을 모아 병사로 훈련시켰다.


    김사용은 평안도 태천 출신으로 우군칙의 제자였는데, 부원수에 임명되어 북진군을 인솔하여 남쪽으로 진군하여 홍총각이 이끄는 남진군과 합세하였다. 그후 요충지인 안주를 공격하기 위해 박천 송림리에서 관군과 싸우다가 유탄을 맞고 사망하였다. 김창시는 평안도 곽산 출신으로 진사에 급제한 지식인이었다. 때문에 그는 자신들이 봉기한 이유와 목적을 담은 격문을 작성하였고, 운산 촛대봉의 금광과 연락을 담당하였다.


    이희저는 가산의 역노로 무과에도 급제한 경력이 있었다. 그는 대청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평안도 내의 부호였는데, 대정강변 다복동 골짜기에 거점을 마련하고 각지의 거부들과 연계를 맺고, 한편으로는 운산 촛대봉 아래에 광산을 경영하여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주고 고용하여 낮에는 광산일에 조사시키고 밤에는 군사훈련을 시켰다. 홍총각은 본래 어염등을 팔던 소상인으로 본명은 홍봉의였는데 나이가 들도록 장가를 가지 못하여 홍총각으로 불리웠다. 그는 곽산 출신으로 체구가 우람하고 키가 5척이 넘어 홍경래가 이끄는 남진군의 선봉장으로 활동하였다.


    홍경래 군은 이러한 지휘부의 통솔 하에 남진군과 북진군으로 나뉘어 군사를 일으킨지 10여일 만에 곽산 등 7개 지역을 석권하였는데, 이는 각 고을의 내응세력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당시 관군은 제대로 대응치 못하고 계속 후퇴하였는데 이는 박천 송림 전투까지 계속되었다.


    홍경래는 가산을 함락하고 청천강에 얼음이 어는 시기를 이용하여 서울로 진격코자 했는데 마침 큰비가 내려 얼음이 녹는 바람에 배를 준비하지 못한 홍경래군은 전략을 바꾸어 1812년 1월에 정주성을 함락시키고 점거했다. 이들이 정주성을 거점으로 군사를 출정시켜 공격을 계속하자 안동 김씨의 한 사람인 선천부사 김익순이 자진 항복했다. 홍경래군은 이어서 박천의 송림에 군사를 주둔시켰으나 함종부사 윤욱렬과 곽산군수 이우식 등의 공격에 버티지 못하고 정주성으로 퇴각하였다.



    홍경래군은 숫적으로 우위인 관군을 맞아 4개월간 공방전을 벌였으나 조정에서 양서순무사 이요원과 순무중군 박기풍을 보내자 사기가 줄기 시작했고 이 틈을 탄 김익순이 김창시의 목을 베어 성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러나 박기풍이 여러 번 정주성을 공략했음에도 소득을 올리지 못하자 박기풍이 파직되고 병사 유효원이 파견되었다. 유효원이 4월에 화약으로 성벽을 폭파시키고 정주성을 공격하자 성을 지키던 봉기군은 놀라 사방으로 달아났고 홍경래는 관군과 싸우다가 유탄에 맞고 죽었다. 이에 그의 목을 베어 상자에 담아 서울로 보내고 우군칙 등도 사로잡아 서울로 압송하여 홍경래의 반란은 평정되었다.


    비록 봉기군은 평정되었으나 당시 정부는 순조가 중풍을 앓고 있어서 국정을 운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순조의 장인 김조순과 훈련대장 박종경에게 정사를 논의케 하였는데..안동 김씨의 후원을 받은 조득영이 박종경이 군권과 경제권을 쥐고 왕권을 흔든다고 상소를 올렸다. 이에 박종경이 병부를 반납하고 서울을 떠났고 순조가 불러도 오지 않아 양주목사로 좌천되었다. 박종경의 실세로 반남 박씨 세력이 정계에서 물러나고 김조순을 중심으로 하는 안동 김씨가 확실히 정권을 잡게 되었다.


    홍경래의 난은 정부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농민층의 분해과정에서 생긴 향촌 부호, 경영형 부농, 서민 지주, 사상인, 몰락 양반 및 지식인 등이 임금노동자와 빈농을 규합하여 일으킨 반봉건 농민항쟁이었다.




    ※임술민란(1862년)※


    철종 말년이 되자 권력은 안동 김씨 세도가 김좌근에게 집중되었으나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60여 년이 되어 가면서 말기 현상이 전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뇌물이나 권력자의 도움으로 각 도와 고을의 관리가 된 자들은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어 다시 세도가에게 바치거나 자신들의 재산으로 착복하였다. 오랫동안 민중들을 교화의 대상으로 여겨왔으나 이 시대에는 수탈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그러면서 전국의 민중들은 서서히 각 군현을 단위로 행정관청과 토호에 대한 저항을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하여 마침내 1862년(철종 13) 임술년에 민란을 일으켰다.


    임술년에 일어난 전국 각지의 민란 중 대표적인 민란은 진주민란이다. 진주민란은 1862년 2월 18일 민란이 일어났는데 직접적인 원인은 경상도 우병사 백낙신의 탐학이었다. 백낙신은 임지에 부임하자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겨우 연명해 가는 농민들에게서 4~5만 냥이나 모았고, 그 무렵 역대 불법 수탈곡인 도결 8만 4천여 냥을 일시에 호별로 배당하여 수납하게 하는 것을 이용하여 그 동안 착복한 환곡 7만2천여 냥을 농가에 분담케 하여 강제징수 하려고 하였다. 이에 진주 서남쪽 30리 정도 떨어진 유곡동에 살던 유계춘이 김수만·이귀채 등과 거사를 하기로 합의하고 한글로 격문을 붙이고 통문을 돌려 2월 18일에 거사를 일으켰다.


    먼저 수곡장터에서 시위를 하고 덕산장터로 가 시위 참여를 강요하였다. 봉기군들은 스스로를 초군이라 부르며 시위에 불참하는 자들에게는 벌금을 부과하고 반대하는 자의 집을 헐었다. 이렇게 되자 소극적이던 농민들이 대열에 참여하여 그 수가 만여 명에 이르렀다. 세를 불린 봉기군은 진주성으로 몰려가 하룻밤을 지샌 후 19일 우병사 백낙신과 목사 홍병원에게서 요구를 들어주겠다는 공문을 받았다. 그러나 흥분한 봉기군은 우병사를 둘러싸고 죄상을 들주며 협박하고 부정한 관리 권준범과 김희준을 화형시키고 4일 동안 향리들을 닥치는 대로 붙잡아 네 명을 때려죽이고 수십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또한 부잣집을 습격하여 23개 면에서 126호를 파괴하고 도둑질한 재물을 빼앗았는데 그 피해액이 10만 냥에 이르렀다.


    조정에서는 진주민란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하고 2월 29일 부호군 박규수를 진주 안핵사로 삼아 파견하여 사태를 조기에 수습하려고 하였으나 박규수는 3개월에 걸쳐 사태를 수습하였다. 그 처벌상황은 농민측은 효수 10명, 귀양 20명, 곤장 42명, 미결 15명이었고, 관측은 귀양 8명, 곤장 5명, 파직 4명, 미결 5명이었다.


    조정의 조기수습 노력에도 불구하고 민란은 충청도와 전라도로 번졌는데 이는 조선 후기에 들어서 충청도에서는 양반들의, 전라도에서는 아전들의 폐단이 극심했기 때문이다. 전라도 관찰사 김시연도 탐학한 관료 중 한 명이었는데, 그의 관할 중 한 곳인 익산의 농인 3천여 명이 1862년 3월 27일에 불법적인 도결의 시정을 요구하면서 관청을 습격하여 군수 박희순을 납치하여 인신과 병부을 빼앗았고, 함열현으로 쳐들어가 현령의 병부도 빼앗았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은 민중들은 김시연을 죽이려고 하자 그는 서울로 도망쳤고 그의 가족들도 전주를 빠져나가자 민중들은 김시연의 모친을 잡아 고문하며 분풀이를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정현을 안핵사로 임명하여 사태를 수습하게 하였고 이정현은 농민 임치수?이의식?문희백 등을 반란주동죄로 처형하고 관찰사 김시연과 군수 박희선을 귀양보냈으며, 이방 임종호, 좌수 최학손 등을 효수하였다.


    4월 16일에는 전라도 함평에서 정한순의 주동 하에 민란이 일어났다.

    함평관아를 습격하여 현감 권규명을 쫓아내고 민가를 부수고 불을 질렀다. 조정에서는 익산안핵사 이정현에게 함평민란을 수습케하여 주동자 정한순 등을 처형하고, 채행렬 등 11명은 귀양을 보냈으며, 현감 권명규를 귀양형에 처하고 좌수 장채성, 호장 이희경, 이방 이흥원 등을 섬으로 유배했다. 조정에서는 임술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그해 5월 25일부터 윤 8월 19일까지 4개월 간 ‘삼정이정절목’41개 조를 제정하여 반포하였다. 그러나 고식적 정책에 불과하여 오래가지 못하였고 삼정의 폐단을 해소하지 못하였다. 1863년 말 철종의 붕어로 고종이 즉위하고 대원군이 정권을 잡으면서 여러가지 개혁정책이 실시되면서 외형적으로 어느 정도는 해소되었다.




    ※임오군란※


    임오군란은 개항 이후 신설된 신식 군대와 구식 군대와의 차별 대우, 일본의 정치·경제적 침투에 대한 백성들의 반일 감정, 흥선 대원군과 민씨 세력간의 다툼 등 복합적인 원인으로 일어났다.


    특히 구식 군대는 신식 군대인 별기군과는 달리 언젠가는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심한 차별 대우로 불만이 컸다. 더욱이 구식 군대에게는 13개월치 봉급이 밀려 있어 불만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전라도 지방에서 세금으로 거둔 쌀이 서울에 도착하여 밀린 봉급을 지급하게 되었는데 이 때 쌀을 지급하던 선혜청 관리가 곡식에 모래와 겨를 섞어 내주고 남은 곡식을 챙기려고 하였다. 이에 분개한 구식 군대의 군졸이 그 관리를 마구 때린 일이 있었다.


    이 보고를 들은 선혜청의 책임자인 민경호가 주모자를 잡아 처형하려고 하자 분노한 군졸들은 민겸호의 집을 습격하고 야인으로 있던 대원군에게 달려가 구원을 요청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이들을 달래는 체하면서 은근히 충동하였다. 이에 힘을 얻은 구식 군대의 군졸들은..



    군기과와 포도청을 습격하여 고관들을 죽였으며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를 죽이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였다. 놀란 일본인들은 인천을 통해 본국으로 도망가고, 명성 황후도 충주로 피신하였다.




    ※갑신정변※


    임오군란 후 청나라의 도움으로 정권을 다시 잡은 민씨 세력은 친청 사대 경향을 띠게 되고 청나라는 이 때부터 조선의 내정에 깊이 간섭하였다. 이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등 젊은 개화파들이었다. 이들은 청나라의 간섭을 물리치고 근대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빨리 근대 국가를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민씨 세력은 청나라에 의존하여 서양 문물을 서서히 받아들이자는 온건 개화파와 손을 잡고 이들의 주장에 반대하였다. 이에 급진 개화파는 빨리 근대화를 이룩하여 열강과 대등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비상 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때마침 청나라가 청·프 전쟁에서 패배하여 정국이 어수선하게 되자, 급진 개화파는 이 틈을 이용하기로 하고, 일본과 모의하여 정변을 일으켜 혁신 정부를 세우려 하였다.


    1884년 10월에 새로 설치된 우정국 개설 축하연을 계기로 급진 개화파는 정변을 일으켜 반대 세력을 몰아내고, 고종을 경운궁으로 모신 뒤 새 내각을 조직하였다. 문벌 타파, 사민 평등, 재정의 일원화 지조법의 개정, 경찰제 실시, 행정 기구 개편 등 14개조로 된 개혁안을 선포하였으나 청나라의 간섭으로 사흘 만에 실패하고, 그 중심 인물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 정변의 실패로 인하여 김옥균 등은 일본에 망명하였으며 우리나라에 청나라의 세력만 강화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조선과 일본 간에는 정변의 뒤처리를 위한 한성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청나라와 일본 간에는 톈진 조약이 체결되어 다시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의 세력 다툼장이 되었다.


    ※동학농민운동※


    개항 이래, 조선을 둘러싸고 전개된 열강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침략 경쟁은 갑신정변 후에 더욱 가열되었다. 청국과 일본 간의 침략적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영국까지도 조선 문제로 충돌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지배층은 외세의 침략에 적절한 대응책을 세우지 못한 채 타협과 굴복을 일삼음으로써, 당면 문제에 대한 해결 능력을 보여 주지 못하였다. 더욱이, 국가 재정은 개항 이후 국제적 분쟁으로 인한 배상금 지불과 근대 문물의 수용에 필요한 경비 지출 등으로 더욱 궁핍해졌고, 지배층의 농민에 대한 압제와 수탈도 심해졌다.


    한편, 조선의 농촌 경제는 일본의 경제적 침투로 피폐해져 갔다. 개항 이후, 조선에 가장 먼저 침략의 손을 뻗친 일본 세력은, 정치적인 면에서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통하여 청국에 밀려 크게 약화되었으나, 경제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청국보다 강세를 유지하였다. 일본 상인들은 처음에는 청국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주로 영국의 면제품 등을 싸게 사다가 비싸게 파는 중계 무역을 하였으나, 점차 자국 제품으로 대치하여 막대한 이익을 취하였다.


    당시, 일본에 대한 조선의 수출품은 미곡이 30% 이상을 차지하였는데 일본 정부의 정치적 비호를 받은 일본 상인들은 조선 농민의 가난한 형편을 이용하여 입도 선매나 고리대의 방법으로 곡물을 사들여 폭리를 취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대응하여, 함경도와 황해도 지방에서는 곡물의 수출을 금하는 방곡령을 내리기도 하였으나, 일본의 항의로 배상금만 물고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농촌 경제는 갈수록 피폐해지고, 농민들의 일본에 대한 적개심도 커 갔다.


    이와 같이, 자본주의 열강의 침탈과 지배층의 착취로 인하여 농촌 경제가 파탄에 이르게 되자 농민층의 불안과 불만이 더욱 팽배해 갔다. 그리고 농촌 지식인들과 농민들의 정치·사회 의식의 급성장하여 사회 변혁의 욕구도 고조되었다.


    이 무렵, 동학의 교세는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확대되어 갔다. 동학의 인간 평등 사상과 사회 개혁 사상은 새로운 사회로의 변화를 갈망하는 농민의 요구에 부합되었고, 동학의 포접제 조직은 대규모 농민 세력의 규합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종래에 산발적으로 일어났던 민란 형태의 농민 운동은 조직적인 농민 전쟁의 형태로 바뀌어 갔다.


    동학의 교세가 확장되자, 동학 교도들은 삼례와 보은 등지에서 대중 집회를 열고, 교조 신원 운동을 벌여 동학을 공인받으려 하였다. 특히, 보은 집회는 동학 교도와 농민이 참가한 대규모의 집회로 발전하여 탐관 오리의 숙청, 일본과 서양 세력의 축출을 요구하는 정치적 구호를 내세우더니 마침내 동학 중심의 종교 운동을 농민 중심의 정치 운동으로 전환시켜 갔다. 동학 농민 운동은 대체로 네 단계로 전개되었다.


    제 1기는 고부 민란의 시기이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와 착취에 항거하여, 전봉준이 1천여 명의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10일 일 만에 해산하였다(1894).


    제 2기는 동학 농민 운동의 절정기로서 전봉준, 김개남 등의 지도하에 동학 농민군이 보국 안민과 제폭구민의 기치를 내걸었던 시기이다. 동학 농민군은 고부와 태인에서 봉기하여 황토현 싸움에서 관군을 물리치고 정읍, 고창, 함평, 장성 등을 공략한 다음, 전주를 점령하였다.


    제 3기는 동학 농민군이 정부와 전주 화약을 맺고, 전라도 일대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그들이 제시한 폐정 개혁안을 실천에 옮긴 시기이다. 전주 화약이 맺어졌으나, 정부는 동학 농민군의 개혁 요구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였다. 이에 앞서 정부는 동학 농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진압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청에 파병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청이 조선에 파병하게 되자 일본도 톈진 조약을 구실로 조선에 군대를 보내어 마침내 청·일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제 4기는, 청·일 전쟁에서 승세를 잡은 일본이 내정 간섭을 강화하자 이에 대항하여 대규모의 동학 농민군이 다시 일어난 시기이다. 동학 농민군은 논산에 집결하였다가 공주의 우금치에서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였으나 근대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패하여 큰 희생을 치렀으며 전봉준 등 지도자들이 체포됨으로써 동학 농민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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