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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고래123
외로운고래12323.03.04

을사늑약 이후 네덜란드에 갔던 특사에 관한 질문입니다.

안녕하세요.

을사늑약 이후에 이에 대해 항의를 위해 네덜란드로 갔던

특사 분들의 성함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회의장 안으로 못들어오게 했다던데 이유는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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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1907년 6월 15일,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막되었다. 6월 19일 그들은

    베를린에서 각국의 수석 대표에게

    보내는 주장문(항고사라고 불렀음)을

    인쇄한다. 6월 25일 이준, 이상설, 이위종이 헤이그에 도착했다.

    6월 28일, 밀사는 "항고사"와 함께 문서를 일본을 제외한 회의 참가국위원회에 보냈지만 일본제국과 대영제국 등의

    방해와 같은 제국들인 서구의

    방관으로 대한제국 대표들은

    회의 참석과 발언을 거부당하고 말았다.

    -출처: 위키백과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05년 을사 늑약 이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는 각국 대표들이 모여 세계 평화에 대해 논의하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릴 예정이였는데 . 이 회의의 목적은 세계 곳곳에서 식민지를 넓혀가던 서양의 힘 있는 나라들이 서로 충돌해 생길 수 있는 전쟁을 미리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고종 황제에게 만국평화회의는 일본의 불법적인 침략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 이준 열사를 파견 하나 일제의 반대로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체포 되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종의 밀서를 갖고 네덜란드 헤이그에 파견된 특사를 헤이그특사라고 합니다. 일본은 제2차영일동맹을 맺고 러시아와 전쟁을 승리하고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맺습니다. 미국과는 가쓰라 태프트 밀약으로 미국이 필리핀을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하는 것을 용인해주기로 합니다. 러시아와 세력균형 상태에 있었던 무게추가 일본으로 기울었습니다. 그 10년 전에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한반도에서 청나라의 종주권이 부정되교 그 영향력을 상실시킨 바 있었지요.

    일본은 먼저 외교권을 박탈하는데 이는 우리나라가 더한 강대국의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종이 서명하지 않은 조약을 대신 다섯명의 동의하에 체결하게 된 것입니다.이 다섯대신을 이완용을 비롯해 을사오적이라고 부르지요. 그리고 이 조약을 강요된 무효인 조약이란 의미에서 늑약이라고 부르지요.

    을사늑약을 맺고 우리는 외교권을 빼앗기게 된 것입니다. 이에 고종은 비밀리에 특사를 파견하게 됩니다.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세사람을 헤이그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나라가 외교권을 잃은 보호국임을 들어 각국 대표가 참석하는 회의에 못들어오게 합니다. 이에 분개한 이준이 자결하여 항의하는 장면에 이릅니다.

    이에 고종은 헤이그 특사를 빌미로 강제퇴위 당하고 군대를 해산당하고 사법권과 경찰권을 빼앗기고 1910년 국권을 강탈당하는 수순을 밟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