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족과 향리에 대해서 질문드려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향리제도의 성립
신라 말 지방의 행정질서는 중앙정부의 왕위쟁탈전에 따른 혼란과 농민의 반란 및 유적(流賊)·초적(草賊) 등의 발생으로 지극히 문란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지방의 세력가와 외관(外官)은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지방 유력자로서 호족(豪族)의 성격을 가진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성주(城主)·장군(將軍) 등을 칭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기도 하고, 궁예(弓裔)·견훤(甄萱) 등의 대호족 세력 밑으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또 지방의 세력가는 기존의 군현체제를 자의적으로 수용하여 관부(官府)를 운영하는 등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호족은 막대한 토지를 겸병하고, 지방의 농민을 사병화(私兵化)하면서 상호간에 족적 결합을 통해 물적·인적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들은 고려왕조가 건국된 이후에도 지방에서 상당한 지배력을 갖춘 정치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추구했던 고려왕조는 호족세력에 대한 통제를 지속적으로 진행하였다. 태조는 여러 호족을 왕실의 등거리에 놓고 회유와 강경책으로 포섭해갔다. 먼저 결혼정책·사심관 제도를 통해 호족을 중앙통치체제에 편입시키고, 그 반대급부로 기존 지배권과 사회·경제적 기반을 유지하게 하였다. 이같이 지방호족이 중앙관료화 되자 상대적으로 지방에 대한 토착적 세력기반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중앙에 진출한 집단에게 지방 세력을 통제하게 함으로써 호족의 분화를 가져왔고, 결과적으로 새로운 지배질서 체제로 흡수되기에 이르렀다.
혜종(惠宗)·정종(定宗) 시기를 거치면서 호족 중에서 왕위계승전에 휘말려 세력기반을 상실한 자들도 많았다. 광종(光宗) 때에 호족세력에 대한 보다 강력한 통제가 실시되었다. 광종은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제정하여 호족의 인적 기반을 약화시켰으며, 과거제(科擧制)를 시행하여 호족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관료집단을 창출하였다.
이러한 고려 왕권의 지속적인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로 호족세력은 극도로 약화되었다. 더욱이 중앙관료화된 집단과 지방에 남아있던 세력간의 족적(族的) 결합도 분화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지방에 남아있던 호족세력은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으며,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의 명령에 따라 지방의 행정업무를 수행하는 향리층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향리 [Hyangri, 鄕吏]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호족들이 향리로 변해간것 입니다.
호족은 신라 말 고려 초의 사회변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지방세력입니다. 신라말 고려초에 호족은 대토지소유로 막대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병을 중심으로 한 무력도 갖추고 중앙과 비슷한 관부를 두어 지역민을 통치하면서 문화를 독점적으로 향유했습니다. 이 세력이 고려왕조를 성립시켰는데, 건국 후 한 부류는 중앙으로 진출해 문벌귀족화하였고 한 부류는 지방 향리의 길을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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