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런던 대화재의 시작은 9월 2일 일요일 자정이 지난 직후 푸딩 레인의 토마스 패리너가 운영하던 제과점에서 불이 시작됩니다. 불은 동풍으로 인해 서쪽으로 번지며 시티오브런던을 덮치게 되었습니다. 당시 주요 화재 진앙 방법은 건물을 철거하며 그곳에 방화벽을 설치해 소화를 하는 방식, 그러나 방화벽 설치는 당시 런던 시장경이었던 토마스 블러드워스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지연되었고 일요일 밤에 대규모 철거의 명령이 내려졌을 때 이미 바람이 제과점의 불을 더욱 거세게 키워 계획이 흐지부지 됩니다. 불은 월요일이 됐을 때 시내의 중심부로 파고 들었습니다.
길거리는 질서가 무너지고 혼란에 가득찼는데 수상하고 이상한 외국인들이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그 원인이었는데 당시 영국은 제 2 차 영국 -네덜란드 전쟁이 한창이었고 적국이었던 프랑스와 네덜란드에게 포커스가 맞추어져있었습니다 . 이로 인해 화재로 집을 잃어버린 노숙자들은 길바닥에 앉게 되었고 이상한 소문으로 인해 린치와 폭력의 희생자가 됩니다. 화요일 불이 도시의 더 많은 곳을 파괴, 세인트폴 대성당을 파괴하고 플리트강을 뛰어넘어 화이트홀에 위치한 찰스 2세의 화이트홀 궁을 위협하자 사람들이 힘을 합쳐 일제히 불을 막기 위해 노력, 다행히 불을 번지게 했던 강한 동풍이 잦아들었고 런던탑의 수비대들이 화약으로 하여금 효과적인 방화벽을 만들었다는 두 가지 요인으로 불은 더 이상 번지지 않게 됩니다.
대화재로 인해 야기된 사회, 경제적 문제들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부푸는데 찰스 2세는 런던 시민들에게 다른 곳의 정착을 고무하기도 했고, 몇몇 난민들을 추방하기도 합니다. 이런 비용 절감을 위한 추방 정책으로 인해 찰스 2세는 런던 내의 반란을 두려워했으므로 런던은 급진적이고 효율적인 다른 도로 재건 제안에도 불구하고 화재 전 사용된 도로와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을 사용해 재건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