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문익점은 목화씨를 붓 뚜껑에 숨겨서 온건가요?
문익점이 우리나라의 의복 문화를 따뜻하게 바꾸어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텐데 진짜 문익점이 가져온 목화씨는 당시 원나라에서 반출이 금지된 품목이었는지 그리고 실제 봇 뚜껑에 숨겨서 가져온건가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문익점음 고려 말의 문신, 학자로 호는 삼병과입니다. 1360년(공민왕 9)문과에 병과로 급제,직강.박사 등을 거쳐 좌정언으로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갔습니다.
원나라 순제는 최유가 추대하는 덕흥군을 왕위에 대립시킬 계획으로 공민왕 폐위에 가담하기를 권유하였으나 불사이군의 충절을 내세워 강경히 거절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운남성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원 순제는 후에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석방시키고, 귀국하게 하였는데 당시 금수품으로 되어 있던 그 곳에서 목화에서 실을 뽑아 무명을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 종자를 붓대 속에 숨겨 가지고 와서 시험 재배를 하였습니다.
3년간의 재배 끝에 성공하여 장인인 정천익 과 함께 종자를 전국적으로 보급하였으며, 목화 섬유를 이용한 의류 제조 등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목화씨 열알을 주머니에 넣어서 가져 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선 이 이야기는 기초적으로 원나라가 목화씨를 금수물품으로 지정했다는 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실제로 원나라가 금수품목으로 지정한 품목은 무기나 화약 등 국방에 있어 매우 중대하거나 희소성이 높은 품목일 뿐, 남쪽에 널리고 널린 게 목화인 만큼 희소성 없는 품목을 금수품목으로 지정했을지가 의문이다. 면화가 화기나 화약의 심지를 만드는 데 쓰이기 때문에 군수품으로 간주되었을 가능성은 있지만[8] 설사 금지품목이었다 해도 당시 원나라의 상황을 보면 전혀 금수가 지켜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고, 문익점은 다년생의 강남산이 아니라 1년생의 화북산 목화를 가져왔다는 게 주 내용.
게다가 2010년에 백제 위덕왕 시기 건축한 것으로 추정되는 충남 부여군 능산리의 절 유적에서 목화에서 뽑은 면사(綿絲)로 짠 직물(면직물)이 발견되어, 문익점이 고려에 처음으로 목화를 들여옴으로서 면직물 생산이 시작되었다는 통념을 반박했다. 사실 예전부터 학계는 물증만 없다 뿐이지 중국에 그 흔한 목화가 고려시대 말에서야 들어왔을 리가 없고 이미 삼국시대부터 썼을 것이라고 예상하긴 했었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그동안 삼국시대 면직물 증거를 찾는데 눈에 혈안이 되어있었는데 그게 발견된 것. 호두도 비슷한 야사가 있었지만[9] 신라 민정문서와 광주 신창동 유적에 이미 고려 이전부터 호두와 호두나무가 있었음이 밝혀진 것처럼, 이런 식으로 언제 뭐가 한국에 들어왔다는 야사는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다.
다만 문익점의 공이 없는 것은 아니다. 본래 목화의 원산지는 인도인지라 사철 온난한 열대 기후에서 잘 자라는 관계로 한국에서는 잘 자라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문익점이 들여온 것은 동북아시아 기후에 적응한 개량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익점 이전에는 재배의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고 삼국사기 색복지를 봐도 통일신라 중기 사람들의 복식으로 견직물, 삼베, 소가죽 등이 주로 나오지 면직물은 언급되지 않으므로 백제 때부터 면직물이 존재했다 쳐도 대중화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재래종[10]의 수량이 극히 희소[11]했던 것으로 보이기에 그 공로가 깎인다고 볼 수는 없다. 이는 목화 보급 100년 만에 조선 전체로 펴져나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문익점은 목화의 대중화에는 상당 부분 기여했으며,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공로다.[12]
《고려도경》을 보면 고려 시대 서민은 일반적으로 흰 모시옷을 즐겨 입었음을 알 수 있는데, 겨울에는 원시 시대부터 입어 온 갖옷이나 (상류층의 경우) 삼국시대부터 활발히 생산된 계(罽) 등의 모직물로 만든 옷을 갖춰 입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무명(면포)은 베나 모시에 비해 더 부드럽고 따스해서 추위를 막는 데 효과적이었으며 특히 목화 솜으로 솜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었다. 개량종의 도입이 당시 한반도인의 의생활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조선왕조실록의 문익점 졸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계품사(計稟使)인 좌시중(左侍中)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나라(元) 조정에 갔다가, 장차 돌아오려고 할 때에 길가의 목면(木緜)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盛囊以來]."
출처: 나무위키 문익점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약간 과장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문익점이 목화를 들여온 이야기는 원나라의 강남으로 귀양가고 귀양에서 풀려나 돌아오는 길에 몰래 붓 뚜껑에 몰래 숨겨왔다는 것인데 사실 . 하지만 당시 목화는 원나라의 반출 금지 품목이 아니었기에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여 집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붓뚜껑에 가져왔다는 것은 여러 변화를 거쳐 나온 이야기로 처음에 그냥 가지고왔다였다가 주머니, 붓대 등 여러 차례 변화를 거쳤습니다.
이는 선비와 문인을 상징하는 붓이 문익점의 이미지에 적합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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