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튤립 파동은 왜 일어난건지요?
안녕하세요? 네덜란드의 튤립 파동이 옛날에 일어났었는데 튤립 꽃이 거의 집 한채 가격으로 사고 팔았던 시대가 있었다고 하네요 이 현상은 왜 일어난건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튤립의 알뿌리에 투기함으로써 발생한 공황.
튤립이 튀르키예에서 유럽으로 유입된 것은 16세기 후반으로 이것이 순식간에 각국으로 퍼져 17세기 초에는 귀족이나 대상인 사이에 크게 유행하였다. 네덜란드에서도 재배 ·개량이 진척되어 1610년경부터 센펠 아우구스투스를 비롯한 수많은 품종이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 이 무렵의 거래관계는 직업적인 원예가나 애호가로 제한되었고 현물거래였기 때문에 투기적 요소는 없었다.
그러나 이듬해 수확할 알뿌리의 선물거래가 시작되면서 투기가 조장되어 1633년에는 상류층은 물론, 기술자 ·하녀에 이르기까지 앞을 다투어 선물거래에 몰려들었다. 이러한 현상은 1636년에 절정에 달하여 이중 삼중의 문서거래가 행하여졌고 1637년 2월 마침내 공황을 일으켜 값이 폭락하고 말았다. 계약 이행이 불가능하여 파산자가 속출하자, 네덜란드 정부가 개입함으로써 거래액의 5∼10%만 지불하는 것으로 수습되어 일단 파국은 모면하였다. 이 공황은 생산의 확장에 기인하지 않은 전(前)자본주의 공황의 대표적인 실례
[네이버 지식백과] 튤립공황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7세기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벌어진 과열 투기 현상으로 종종 튤립 중 아주 희귀한 색을 가진 꽃이 피는데 이걸 부유층에 팔면 100년동안 놀고 먹을 부가 쏟아져 현대의 비트코인처럼 빈곤층부터 유명인까지 전 재산을 탕진하며 튤립키우기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3달만에 유행이 사그라들자 튤립 키우기에 몰두한 이들이 하루아침에 망하게 된 사건입니다.
거대 제국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네덜란드에서 과중한 세금과 프로테스탄트의 급격한 성장 등이 원인이 되어 1568년 독립전쟁이 발발했고 1648년 네덜란드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국제적으로 공식적인 독립국이 됩니다.
저지대 지역 가운데 가장 부유하고 증권거래소와 은행이 밀집해있던 도시인 안트베르펜이 포함된 남부지역이 1587년 에스파냐에 점령당한 뒤로 암스테르담이 새로운 금융 중심지로 각광받으며 전문인력이 대거 몰렸고 이에 종교적 박해를 피해 도망 온 유대인들과 위그노들이 암스테르담으로 막대한 자금을 들고와 금융업에 뛰어들었습니다. 1609년 암스테르담에 세계 최초 증권거래소가 설립되어 영국과 국채거래로만 매년 2500만 길더 이상의 수익을 얻는 등 너무 빨리 돈이 돌자 금융업자들은 경기과열을 막기 위해 은행을 만들어 다른 사업을 하게 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네덜란드 전역에 은행과 증권거래소가 들어섰고 이들은 실물 상품, 주식, 외환, 신용대출까지 손을 대며 스페인의 군사적 위협이 사라지고 독일 지역에서 벌어진 30년 전쟁의 여파로 보헤미아와 체코 등의 직물 산업이 붕괴되자 네덜란드업자들은 독점 속에 호황을 누르게 됩니다.
이러한 사업으로 불어난 자본은 다른 투자대상을 물색, 이내 눈을 돌린 것이 튤립입니다.
튤립은 원래 유럽에 없던 꽃으로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에 주재하던 오스트리아 외교관이 튤립을 선물로 받아 오스트리아 빈으로 가져왔고 후 플랑드르의 식물학자인 샤를 드 레클루제가 튤립을 손에 넣어 1593년 레이던 대학의 교수로 임명될때 가지고왔습니다.
그 전에 부호나 식물 애호가만 알고있던 튤립이 이때 네덜란드에 들어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단색의 평범한 튤립은 저렴한 가격으로 거래되었지만 희귀한 튤립은 무척 비싸 희귀한 튤립의 보유 여부가 부의 척도로 간주되어 부유층들이 희귀종을 찾아다녔습니다.
희귀종을 잘 키우면 돈이 되고 더욱 아름다운 변종을 만들어낼수 있으면 더 큰 돈을 벌게 되어 네덜란드 전역에서 튤립 알뿌리 확보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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