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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태양새285
탁월한태양새28523.05.20

적고적의 난이라는 건 어떤 반란이죠?

안녕하세요. 적고적의 난이라는 건 무슨 사건인가요?

적고적이 난이 일어난 시기와 반란이 일어난 시대적 배경은 어떻게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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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적고적 난 > 10년(서기 896년) 도적들이 나라의 서남쪽에서 봉기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지를 붉게 물들여 스스로 남들과 다르게 하였기 때문에 적고적 이라고 불렀습니다. 주와 현을 도륙하고 도읍의 서부 모량리 까지 와서 사람을 위협하고 노략질을 하고 돌아갔습니다.

    적고난은 신라말기에 일어난 농민반란군의 난으로 집권적인 지배체제가 서서히 무너지면서 중앙정부의 지배층 내부에서는 권력 쟁탈전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한편 지방에서는 지배층의 수탈과 계속되는 자연재해로 농민들이 농토에서 유리되어 약탈을 자행하는 초적이 되어 저항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유는 889년 (진성왕3) 중앙정부가 지방권.현에 대해 조세를 독촉한 것을 계기로 해 전국적으로 번졌고 신라정부는 이미 수습할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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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적고적이 일어난 지역은 나라의 서남쪽이라고 하며 정확한 위치는 기록에 없지만 신라 영토의 서남부는 지금의 전라도 지역에 해당, 지금의 경상도 서남부도 동해안 가에 있는 서라벌 기준에서 꽤 서남쪽이므로 배제할수 없으며 전라도는 이미 앞서 892년 견훤의 난을 일으켜 봉기한 상황이었고 견훤은 신라 조정의 명을 받고 서남해 해안의 호족과 해적을 평정 후 야망을 드러내어 892년 무진주를 점령, 900년 완산중 도읍하는 능 점점 내륙으로 북상하던 시기였는데 적고적은 견훤 세력권 밖에 근거리를 두고 활동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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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9세기 후반 신라의 상황은 당시 진성여왕의 실정으로 국가 질서가 극도로 문란하였습니다. 특히, 889년(진성여왕 3)에는 많은 지역에서 주민들의 세금이 수납되지 않아 국고가 고갈되었습니다.


    이에 중앙정부에서는 관리를 파견하여 세금을 독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농민반란의 기폭제 구실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889년 원종(元宗)·애노(哀奴)의 난 등 농민반란이 일어나고 독자적인 할거 세력이 나타나 전국적인 내란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이들 반란군 가운데 붉은 바지를 입은 무리가 있었는데, 이들을 당시 적고적(赤袴賊)이라 불렀습니다. 896년(진성여왕 10) 적고적은 동쪽으로 진격하여 신라의 수도인 경주 서남방면까지 진격할 정도로 기세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뒤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는데, 아마 진압되었든지 아니면 다른 농민반란군에 흡수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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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적고적이 일어난 지역은 나라의 서남쪽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위치는 기록에 없지만 신라 영토의 서남부는 지금의 전라도 지역에 해당하고 지금의 경상도 서남부도 동해안 가에 있는 서라벌 기준에서는 꽤 서남쪽이므로 배제할 수 없다. 전라도는 이미 앞서 892년에 견훤이 난을 일으켜 봉기한 상황이었다. 견훤은 신라 조정의 명을 받고 서남해 해안의 호족과 해적을 평정한 다음에 야망을 드러내어, 892년에 무진주(지금의 광주광역시)를 점령하고 900년에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주시)에 도읍하는 등, 점점 내륙으로 북상하던 시기였는데 적고적은 견훤 세력권 밖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출처: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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