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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태양새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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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척과 재인은 무슨 역할,신분이었나요?

안녕하세요. 한국사에서 화척과 재인은 어느시대에 있었으며 이들이 하는 일,역할은 무엇이었나요? 그리고 이들의 신분은 어떠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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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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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화척은

    고려시대에 화척은 국가에 신공(身貢)을 바쳤는데, 조선이 건국한 뒤인 1414년(태종 14)에는 지폐인 저화(楮貨) 30장을 내자시(內資寺)에 납부하였다. 재인(才人)과 마찬가지로 도살업, 유기(柳器 : 고리) 및 피물(皮物)의 제조, 수렵, 육류 판매 등을 주된 생활수단으로 삼았다. 때문에 일반 양인들은 이들과의 혼인이나 이들의 거주를 꺼려했으며, 화척 또한 자기들끼리의 집단생활을 좋아하여,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며 일시 거주하는 유랑생활을 지속하였다. 화척은 전국적으로 분포하였고, 특히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에 많았다.

    화척은 집단으로 유랑하면서 걸식, 강도, 방화, 살인 등을 자행하였다. 고려 말의 홍건적 침입 때에는 길잡이 노릇을 하였으며, 왜구를 가장해 민가를 약탈하기도 하였다. 1356년(공민왕 5)에는 나라에서 화척을 비롯해 제주 사람과 재인을 모두 찾아내어 서북면 수졸(戍卒)로 충당하기도 하였다. 화척이 서북면 지역 군사로 충당되거나 왜구를 사칭해 노략질을 일삼았던 것은 그들의 유목민적 기질과 농경에 정착하지 못해 항산(恒産)이 없는 열악한 처지를 말해주는 사례이다.

    화척은 호적에 등록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 지배를 받는 공민(公民)의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조선 태조 이후 성종 때까지 조정은 이들을 호적에 올려 파악하려고 하거나 토지를 지급해 농업을 생업으로 삼도록 하였고, 그러한 자에게는 신공을 면제시켜주는 정책을 계속 펴나갔다. 아울러 독립된 집단 생활과 자기들끼리의 혼인을 금지시키는 한편, 일반 양인과 함께 살게 하면서 혼인을 장려하였다. 또한 지방 관아에서 이들을 찾아내 각 방(坊)과 촌(村)별로 보호하게 하고, 장적을 만들어 형조·한성부·감영 및 각 고을에 보관했다가 출생·사망·도망 등의 사항을 기재하도록 하는 등 철저히 점검하였다.

    화척은 유목민 출신이어서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숙하였다. 때문에 이들은 고려 말 왜구 격퇴와 1419년(세종 1)대마도(對馬島) 정벌,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 진압 등 외적의 방어와 내란의 평정에 동원되어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군공을 계기로 이들의 무예는 인정받았고, 화척은 세종대 이후에 취재(取才)를 통해 갑사(甲士)·별패(別牌)·시위패(侍衛牌) 등의 군인으로 편입되기도 하였다.

    재인은

    고려시대 이래 국가에 신공(身貢)을 바쳤으며, 1414년(태종 14)의 경우 저화(楮貨) 50장을 내자시(內資寺)에 납공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들의 생활수단은 화척(禾尺)과 마찬가지로 유기(柳器)·피물(皮物)의 제조와 도살·수렵·육류판매 등이었다. 때로는 가무를 통해 생활하기도 했는데, 조선 중기 이후에는 주로 창극(唱劇) 등의 기예(技藝)에 종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 양인들은 이들과 함께 거주하거나 혼인하기를 꺼려하였다. 이에 이들도 자기들끼리의 집단생활과 혼인을 도모했고, 여러 지역을 돌며 일시 거주하는 유랑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걸식·강도·방화·살인 등을 자행했으며, 고려 말에는 왜구를 가장해 민가를 약탈하기도 하였다.

    이에 조선의 조정은 이들에게 토지를 지급해 농업을 생업으로 삼도록 하고, 그러한 자에게는 신공을 면제시켜주는 정책을 태조 이후 성종대까지 지속하였다. 그리고 독립된 집단생활과 자기들끼리의 혼인을 금지시키고, 일반 양인과의 잡거(雜居)와 혼인을 장려하였다.

    또, 이들을 찾아내 각 방(坊)과 촌(村)별로 보호하며, 장적을 만들어 형조·한성부(漢城府)·감영(監營) 및 각 고을에 보관했다가 출생·사망·도망 등의 사항을 점검하게 하였다.

    1423년(세종 5)에는 천민이라는 인식을 불식시키기 위해 화척과 더불어 백정(白丁 : 이른바 新白丁을 말함.)으로 개칭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재인 또는 재백정 등으로 불렸다.

    『경국대전』에도 재인이라 표기되어 있어 조정의 정책이 성과를 본 것 같지는 않지만, 16세기를 계기로 점차 양인으로 동화되어갔으며, 농경생활에 정착하게 되었다.

    한편, 재인은 유목민출신으로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해, 고려 말의 왜구격퇴와 1419년의 대마도(對馬島) 정벌, 초적(草賊)의 체포와 이시애(李施愛)난의 진압 등 외적 방어와 내란 평정에 동원되어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이들의 무예가 크게 인정받으면서, 세종대 이후에는 취재(取才)를 통해 갑사(甲士)·별패(別牌)·시위패(侍衛牌) 등의 군인으로 편입되기도 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화척, 재인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양수척에 관한 기록은 고려 후기에 나타나지만 그 기록을 통해 고려 전기 이래 그것이 실재함을 알수 있습니다.

    양수척은 고려초부터있어왔으며 여진족, 거란족의 후손이며 그들은 사냥과 유기제조 및 창우의 일로써생업을 삼았고 고려 말기가 되어 창우의 일을 전업으로 하는 재인이 떨어져 나가 독자적 계층을 이루며 나머지 양수척은 화척으로 바뀌어 사냥과 유기제조와 도살의 일로써 생업을 삼았습니다.

    이들은 백정이라 불렀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재인이나 백정을 집단적으로 거주시켜 관리하고 거주지를 마음대로 벗어나지 못하도록 규정하였다. 백정은 재인과 화척의 합칭이지만 『경국대전』에 ‘재인과 백정’으로 쓰인 것으로 보아 화척만 백정으로 불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예능에 종사하는 재인과 도살업을 담당하던 화척을 같은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아무래도 자연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출처:우리역사넷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화척"은 고려시대에 국가에 신공(身貢)을 바쳤는데, 조선이 건국한 뒤인 1414년(태종 14)에는 지폐인 저화(楮貨) 30장을 내자시(內資寺)에 납부하였습니다. 재인(才人)과 마찬가지로 도살업, 유기(柳器 : 고리) 및 피물(皮物)의 제조, 수렵, 육류 판매 등을 주된 생활수단으로 삼았습니다. 때문에 일반 양인들은 이들과의 혼인이나 이들의 거주를 꺼려했으며, 화척 또한 자기들끼리의 집단생활을 좋아하여,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며 일시 거주하는 유랑생활을 지속하였습니다. 화척은 전국적으로 분포하였고, 특히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에 많았습니다.


    화척은 집단으로 유랑하면서 걸식, 강도, 방화, 살인 등을 자행하였습니다. 고려 말의 홍건적 침입 때에는 길잡이 노릇을 하였으며, 왜구를 가장해 민가를 약탈하기도 하였습니다. 1356년(공민왕 5)에는 나라에서 화척을 비롯해 제주 사람과 재인을 모두 찾아내어 서북면 수졸(戍卒)로 충당하기도 하였습니다. 화척이 서북면 지역 군사로 충당되거나 왜구를 사칭해 노략질을 일삼았던 것은 그들의 유목민적 기질과 농경에 정착하지 못해 항산(恒産)이 없는 열악한 처지를 말해주는 사례입니다.


    "재인"은 고려시대 이래 국가에 신공(身貢)을 바쳤으며, 1414년(태종 14)의 경우 저화(楮貨) 50장을 내자시(內資寺)에 납공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의 생활수단은 화척(禾尺)과 마찬가지로 유기(柳器)·피물(皮物)의 제조와 도살·수렵·육류판매 등이었습니다. 때로는 가무를 통해 생활하기도 했는데, 조선 중기 이후에는 주로 창극(唱劇) 등의 기예(技藝)에 종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반 양인들은 이들과 함께 거주하거나 혼인하기를 꺼려하였습니다. 이에 이들도 자기들끼리의 집단생활과 혼인을 도모했고, 여러 지역을 돌며 일시 거주하는 유랑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걸식·강도·방화·살인 등을 자행했으며, 고려 말에는 왜구를 가장해 민가를 약탈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조선의 조정은 이들에게 토지를 지급해 농업을 생업으로 삼도록 하고, 그러한 자에게는 신공을 면제시켜주는 정책을 태조 이후 성종대까지 지속하였습니다. 그리고 독립된 집단생활과 자기들끼리의 혼인을 금지시키고, 일반 양인과의 잡거(雜居)와 혼인을 장려하였습니다.

  • 양인인데 천민 취급을 받은겁니다. 어떤책을 보신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답변이 확실합니다.

    재인은 광대 화척은 백정( 고려시대떄는 백정이 일반 백성을 가리킴) 진척은 나룻배사공이고 모두다 고려시대때 험한일을 하던사람들입니다